내가 ‘묵은지’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해남으로 내려와서다. 그 전에는 ‘묵은 김치’라고만 알고 있었다. 2003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여름휴가철을 맞아 땅끝을 찾아 온 관광객들에게 송지면 부녀회원들이 묵은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2~3년을 김장독에서 숙성시킨 김치를 묵은지라고 부르다는 것을 이 때 알았다.

이렇게 오래 묵은 김치는 보약이나 다름없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다음해부터인가 ‘묵은지’를 이름으로 내건 식당들이 전국적으로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묵은지 열풍’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전에도 김치찌개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묵은지’나 ‘오모가리’와 같은 이름으로 포장을 하니 사람들은 새로운 김치의 출현으로 생각했는지. 이 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김치 주권을 지켜야할 때

 

이와 같이 묵은지의 열풍이 계속되자 공급이 딸리면서 급기야는 가짜 묵은지까지 등장하게 된다. 김치를 졸속으로 숙성시켜 묵은지처럼 둔갑을 시킨 것이다.

그 뿐인가. 해마다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김치가 20만 톤이 넘는다. 관세청의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김치 수입량은 21만2938톤으로 2011년 이후 4년 연속 연간 20만 톤을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수입 김치의 99% 이상은 중국산이다. 국산의 3분의 1 수준인 값싼 중국산 김치는 어지간한 일반 식당과 학교 급식을 통해 대량으로 소비된다.

대한김치협회의 조사로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제공하는 김치의 95%가 중국산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김치의 원조인 국산 김치의 중국 수출은 미미하기만 하다.

중국 정부가 김치를 발효식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의 가열처리 채소절임인 파오차이(泡菜)의 검역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중국에 수출할 수 있는 김치는 살균 처리된 볶음김치뿐이다.

또 설상가상으로 국산 김치의 최대 소비국인 일본에 대한 수출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일본으로 추출되는 김치는 2009년의 2만4389톤에서 2014년 1만6968톤으로 5년 새에 30% 이상 감소했다.

현지 업체들이 자기네 입맛에 맞는 김치 제조를 본격화한 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김치 주권을 지켜야 하는 절박함이 있다.

전라도에서는 김치를 ‘지’라고 부른다. 갓 담근 김치는 ‘쌩(생)지’, 익은 김치는 ‘익은지’, 신 김치는 ‘신지’, 그리고 묵은 김치는 ‘묵은지’. 그런 식이다. 고대로 중국에서는 김치류를 ‘저(菹)’라 했고, 우리는 ‘지(漬)’라 불렀다.

이처럼 소금물에 절인 지를 ‘침채(沈菜)’라 한 것이 ‘팀채’,와 ‘딤채’를 거쳐 ‘김치’로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오이지’니, ‘짠지’라고. 절임류의 김치를 오래 전부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렇게 불러왔다.

그런데 묵은 김치를 묵은지라고 부르니. 마치 오랜 전부터 그렇게 불러온 것 같은 친근감마저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때문에 내가 해남에 와서 묵은지라는 말을 처음 들었으므로 내게는 해남이 묵은지의 본향처럼 느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욱이 겨울배추의 국내 최대 산지로서 해남은 그런 대접을 받을 권리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또 화원농협이 1995년 12월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절임배추를 출시한 이래로 해남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를 생산하는 등 ‘절임배추=해남’이라는 등식이 이미 전국적으로 성립될 정도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아마 해남의 절임배추도 내가 묵은지를 알았던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걸로, 당시 소금으로 절이던 데서 벗어나 바닷물로 절인다는 것을 알았던 기억이 난다.

 

배추 조형물 하나 없는 해남군의 홍보

 

내가 해남을 묵은지의 본향이라는 주장하는 것은 해남의 김치, 나아가 해남 배추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데 있다. 그것은 묵은지의 본향으로서의 해남 배추가 최근 들어 홀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과잉생산 때문인지 몇 년 사이 해마다 ‘시장격리’를 하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돼버렸다. 이는 해남군 차원의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타 지역을 보면 사과의 고장은 사과를, 양파의 고장은 양파, 마늘의 고장은 마늘과 같이 저마다 지역의 특산물 홍보를 위해 대형 조형물을 입구에 설치해 놓고 있다.

그러나 해남군의 경우 육로의 관문격인 계곡면과 산이면 어디에도 배추의 고장, 덧붙여 고구마의 고장임을 알리는 조형물 하나 설치해 놓지를 않았다. 이렇게 군민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홍보에는 인색한 해남군인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파릇한 생명력으로 해남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전원의 풍경을 선사하는 겨울배추다. 물론 서울에서 배추 판촉을 위한 김장 특판전을 연다거나 김장나눔축제를 여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의례적인 행사로는 생색내기 전시행정의 범주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차제에 해남군이 주인이 되는 범 국민적인, 나아가 세계적인 행사를 기획할 필요가 있다.

김치가 우리의 것이라면 곧 해남의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일을 하면서 마냥 뒷북만 쳐서는 안 된다.

장성군이 홍길동을, 곡성군이 심청이를 내세워 지역을 알리는 것처럼 해남군이 묵은지의 본향임을 주장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다.

기회는 선점하는 자의 몫이다. 올해도 평탄치 않은 배추밭을 바라보면서 이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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