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나이 45억 년을 1년으로 친다면 작금의 현생인류는 언제 등장했을까?

한 해가 끝나기 5분 전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표면의 역사를 바꾸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인간은 역사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뭇짐승과는 다르게 자식에게 자신이 터득한 지혜를 전달하여 자신보다 잘 살기를 바란다.

덕분에 삶의 지혜는 대를 이어가면서 눈덩이처럼 보태어진다. 이는 인류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를 몰라도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지난 간 과거 즉, 뿌리를 무시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져오는 일은 쉽지 않다. 발전에는 진취적 용기도 필요한데, 사고의 전환에서 출발된다.

우리는 서울을 갈 때 ‘올라간다〔上京〕’고 한다. 이는 바른 표현일까? ‘아니다’ 서울로 가는 것은 북(北)으로 수평이동 한 것이므로 틀린 표현이다. 해남읍의 금강산을 올라갈 때와 같이 수직이동 하였을 때 ‘올라간다’는 표현이 맞다.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관습적으로 틀림을 옳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우리 해남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땅끝해남, 지도를 거꾸로 놓아보면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해남은 땅끝이 아니고 ‘땅머리’에 해당한다. 중앙에는 제주도와 오끼나와, 좌측에는 일본의 큐슈, 우측에는 중국 제일의 도시 상하이가 가깝게 위치한다. 다른 세상이 열려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해남의 고대역사에서 생생하다. 당시는 바닷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몇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그 진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단일 무덤으로 제일 큰 왕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신라의 경주’라는 대답이 전자동으로 쏟아지지만 틀렸다. 정답은 ‘해남’이다. 북일면 장고봉(전방후원형 76m) 고분이 가장 크다. 경주의 황남대총은 120m이지만 단일 무덤이 아니고 두 개가 붙은 쌍무덤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장고봉은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왕무덤으로, 그 생김새로 전방후원형(앞: 네모, 후: 원형)이라한다.


▲고대문화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만 갔을까?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정답은 ‘no(×)’이다. 문화는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다. 전거의 장고봉 고분에서도 알 수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일본이 원류인 것이 분명하다. 한때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런 형태의 무덤은 영산강 유역에서만 14개가 확인되었는데, 해남의 것이 가장 크다. 당시 무덤은 지도자 자신이 생전에 만들었고, 세력의 크기를 의미하므로 이들 중의 우두머리라고 해도 좋겠다.

땅끝해남이 우리나라 전방후원형고분사회의 중심지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전방후원형 무덤에서 나온 원통형토기, 큰칼, 말 관련 도구 등은 일본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다. 게다가 무덤의 돌방에 붉은 칠, 무덤표면을 돌로 장식 등까지 닮았다. 묻힌 사람도 왜인(일본인) 인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시기 읍치가 아닌 곳이니 백제인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한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과 같은 불편한 진실들이다.


▲지금부터 1600여 년 전 무렵에 해남에서 사라진 대형옹관문화의 원류는 어디일까?
대형옹관은 두 개 항아리의 입구를 합한 크기가 250㎝ 전후이다. 당시 지도자가 사망 시 매장하는 방법으로 해남에서는 삼산천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이 매장법은 세계에서 유이하게 일본의 큐슈지역과 우리나라 영산강 중하류와 서해연안(해남~익산)에서만 확인됐다. 대형옹관문화, 이도 우리가 원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본은 서기 300년 이전에 사라지고 우리는 이 무렵에 등장하므로 시기적으로 원류는 일본 큐슈지역이다. 게다가 삼산천 인근 용두리 전방후원형 세력에 의하여 해남의 대형옹관사회가 무너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의 남쪽 월주(절강성 동북부)지역과 관련된 우리나라 대규모 청자문화의 시작은 어디인가요?
정답은 강진이 아니라 해남이다. 한국 청자 집단발생은 화원면에서 시작하여 산이면에서 철화청자가 꽃피었다. 먼저 화원면 초기청자 공단에서 찻잔 등이 만들어져 전국에 공급됐다.

그리고 산이면에서는 철화(황토그림) 청자로 고급의 장구와 매병 등을 대량 생산했다. 이는 장보고와 같은 강력한 해상세력이 운영했을 것이다. 청자생산능력 외에도 바닷길을 통한 유통망 등을 갖추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대 해남은 한중일 바닷길의 요충지로 해상세력의 웅거지였으며, 변방이 아닌 선진지였다. 이런 역사관과 세계관이 절실하다. 사고를 전환하여 미래를 준비하자.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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