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던 영등포의 밤...’으로 시작되는 ‘영등포의 밤’은 오기택(吳基澤)이 1962년 부른 데뷔곡으로, 그는 이 노래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다.

당시 영등포에는 시골에서 상경해 공장에 다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고된 타향살이와 공장 일에 지친 청춘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위안을 삼고는 했다. 거리에는 온통 이 노래로 넘쳐났다.

‘영등포의 밤’이 오기택의 출세작이라면 ‘아빠의 청춘’은 대중가요사에 고전(古典)이라 할 만한 곡이다. 물론 ‘고향무정’이니, ‘충청도 아줌마’ 등 많은 히트곡들이 있지 만 ‘아빠의 청춘’은 요즘 세대들도 쉽게 따라 부를 만큼 국민애창곡이 된지 오래다.

매혹적인 중저음의 창법으로 60,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오기택. 그가 지금 많이 아프다. 뇌출혈 후유증 때문이다.

지난 1996년 연말연시를 맞아 찾은 제주 추자도 옆 무인도인 염섬. 이곳에서 오기택은 홀로 바다낚시를 하다가 쓰러져 죽음의 공포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

극한의 고통속에서 꼬박 이틀 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됐으나 그 후유증은 가혹했다. 왼쪽 다리와 팔에 마비가 온 것. 재활치료를 통한 재기의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휠체어에 의지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거동이 가능한 상태다.

1939년 (호적상으로는 1943년) 해남 북일면 월성리에서 태어난 오기택은 북일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 성동기계공고를 졸업했다. 외삼촌의 권유로 이뤄진 서울 유학이었다.

고교 졸업 후 회현동 동화백화점(현재는 신세계백화점)에 있던 동화예술학원을 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오기택은 1961년 KBS가 주최한 제1회 직장인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한 것이 가요계에 얼굴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를 가수로 이끈 사람은 다름아닌 어머니였다. “술 조금 마시라. 너는 목소리가 좋으니 딴생각 말고 노래나 잘 부르도록 해라.”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오기택에게 어머니는 그야말로 인생의 전부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아왔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발탁이 된 오기택은 그가 작곡한 ‘영등포의 밤’을 1962년 12월 신세계레코드에서 취입을 한다. ‘영등포의 밤’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기세를 꺾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신세기레코드사는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영등포의 밤’의 히트로 회사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5년 전에는 영등포구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영등포의 밤’ 노래비를 세워줬다.

이번 주말에 ‘제9회 땅끝 해남 오기택배 전국가요제’가 열린다. 해남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행사다. 오기택은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지만 정작 고향인 해남을 노래한 곡은 보이지 않는다.

굳이 꼽으라면 ‘고향무정’이라고나 할까. 해남을 노래한 곡으로는 남성듀엣 ‘하사와 병장’이 불러 히트한 ‘해남 아가씨’가 생각난다. 차제에 명실상부한 해남의 노래가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중가요만큼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것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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