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에 가면 신덕리 신평마을에 일본식 고가가 있다. 마을 진입로변 작은 다리 건너에 있는 고가는 일본식 이층집 구조로 외견상으로 금세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로 폐가나 다름없다.

규모로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가 지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가는 해방 후에 적산가옥으로 불하가 됐을 것이다.

한 주민의 말로는 지역에서 운수업을 하던 사람이 거주했고, 진료소로서의 기능을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빈집으로 방치돼 쓰러지기 직전의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에 이 집을 찾아갔을 때는 집 앞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쇠락한 고가와 어우러진 만추의 풍경이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은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이 역사 바로 세우기인가

다시 가을을 맞아 그곳을 다시 찾아 갔다. 그러나 아직 은행잎은 물들지 않았고. 집은 더욱 낡아 스산하기만 한 것이 흉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주변의 말로는 집주인이 철거할 거라는 소문이었고. 지금 상태로는 그것이 어쩌면 집주인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러나 100년은 족히 되었을 이 집을 이대로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해남의 근대문화유산이 될 만한 일본식 가옥을 속절없이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혹자는 그까짓 일본식 가옥 하나쯤이야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으나 식민지라는 치욕의 역사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보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아래 얼마나 많은 일제강점기의 건물들이 사라져갔는가.

초가와 기와 일색이었던 우리의 건축문화에 서구적인 건축미를 가미한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였다.

건물 뿐 만이 아니라 교량이나 도로와 철도 등도 이 시기에 기초를 닦아 놓은 셈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70년대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상당수의 그 시절 건물들이 사라져갔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교사(校舍)였다.

널빤지를 덧댄 형식의 단층구조였는데 이 역시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모델링을 거쳐 슬래브 건물로 개축하면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특히 후문 옆의 교장 관사는 일본 전통가옥의 규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화로 소실이 됐고. 학교 근처에 있던 주재소 또한 현관을 예전 모습 그대로 두고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어느 새인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처럼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아니면 별다른 생각이 없이 폐기처분한 건물들은 부지기수다.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이 되던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문민정부는 경복궁 앞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일제가 지은 총독부 건물을 허물어 버렸다. 물론 명분은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의 역사적인 가치를 들어 다른 곳으로 이전 복원을 해서 보존해야 한다고 했지 만 결국은 해체를 했고, 돔 형식의 지붕 일부분의 석재만 천안 독립기념관 구석에 가져다 놓았다.

총독부 건물은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기초설계를 해 10년의 공사를 거쳐 1926년 완공한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의 석조 건물이었다.

일본에도 이런 수준의 건축물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방 뒤 이 건물은 미 군정청 하지 중장 집무실로 쓰였고, 48년 5월 제헌국회가 이곳에서 역사적인 개원을 했다.

48년 7월 24일 청사 현관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기도 했다. 정부 수립 뒤 38년간은 정부 중앙청으로 기능을 하다가 과천 정부청사로 이전을 하며 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역할을 했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총독부 보다 중앙청으로 사용한 기간이 더 길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었으나 문민정부의 독선으로 말미암아 95~96년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때로는 그리워지는 아날로그 향수

이것은 명분이야 어찌 됐든 문화재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로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치욕의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교훈 삼아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일 것이다. 해남군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일제강점기의 건물들이 상당수가 사라지고 변형이 됐지만 아직도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그러나 신덕리의 경우와 같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는 건물도 여럿이다.

그렇다면 아직 형태라도 남아있을 때 해남군이 나서서 제대로 복원을 하면 어떨까. 그것이 어렵다면 영화의 세트장으로라도 활용을 해서 관광 상품화 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속도에 밀려나는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때로는 아날로그의 향수가 그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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