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읍 학동리와 마산면 장촌리를 잇는 아침재, 해남에 새로 부임한 현감이 고개를 넘어 마산지역의 토호들에게 아침인사를 드리러 다녔다고 해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 해남에서 태어나 해남에 묻힌 석천. 장촌리에서 은적사 가는길에 너무도 초라한 안내판 하나가 석천의 묘 가는 길을 가르키고 있을 뿐이다.

 마산으로 넘어가던 옛길 아침재와 석천 임억령

 

담양 남면 지곡리에 가면 증암천이 내려다보이는 성산(星山) 끝자락 풍광 좋은 곳에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그림자가 쉬어가는 곳. 장자(莊子) ‘어부(漁夫)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어부의 비범함을 알아 본 공자가 전국을 유세하며 네 가지의 고난을 겪은 까닭을 묻는다. 이에 어부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준다.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발을 빨리 움직일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고,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림자는 그의 몸을 떠나지 않았죠. 그래도 그는 아직도 느리게 뛰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쉬지 않고 뛰다가 결국에는 지쳐 죽고 말았답니다. 그늘 속에 쉬면 그림자가 사라지고, 고요히 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 겁니다.”

식영정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위해 1560년에 지어 준 정자다. 그즈음 임억령은 담양부사를 그만 두고 해남과 창평을 오가며 문사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별뫼’라 불리는 성산으로 들어온 것은 그저 그림자를 없애기 위함이 아니었다. 천생 시인이었던 석천은 만년을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는 삶을 꿈꿨고. 장자에 영감을 받아 정자를 식영정이라 이름 짓는다. 식영정에는 담양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석천을 비롯해 서하당, 그리고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등 이른바 ‘식영정 4선(仙)’이라 불린 이들은 성산의 경치 좋은 스무 곳을 택하여 각자 20수씩 모두 80여 수의 ‘식영정 20영(詠)’을 지었는데, 이것은 송강 정철의 걸작인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된다. 석천은 이곳에서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송천 양응정, 고죽 최경창 등 제자를 길러내 성산동 계산풍류의 시종(詩宗)으로 추앙을 받는다. 옥봉과 고죽은 손곡 이달과 더불어 ‘삼당(三唐) 시인’이라 불릴 만큼 탁월했다.

 

현감이 아침 문안인사차 넘던 고개

 

해남읍에서 명량로를 따라 진도 방면으로 가다 학동 삼거리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면 멀리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 보인다. 아침재다. 해남읍 학동리와 마산면 장촌리를 잇는 아침재는 십리 남짓한 고개다. 이 고개에 ‘아침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해남에 새로 부임한 현감이 고개를 넘어 마산지역의 토호들에게 아침인사를 드리러 다녔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마산지역은 백제 이래로 죽산현이 있던 곳으로 해남의 토호세력이 존재했다. 오늘날 ‘민(閔) 이(李) 박(朴)’이라고, 여흥 민 씨, 원주 이 씨, 무안 박 씨를 해남의 명문가로 일컫는 것도 이곳에서 비롯됐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마산면에는 지금도 이들 집성촌이 형성돼 있어 오랜 뿌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성씨에 대한 자긍심은 광주지역의 경우 ‘기 고 박’을 꼽기도 하는데 이는 고봉 기대승과 고경명, 그리고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과 조카인 사암 박순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성씨 뿐 만이 아니라 ‘광 나 장 창’이라고 명문가의 고장을 꼽기도 한다. 이것은 광주, 나주, 장성, 창평으로 광주가 ‘천년 목사(牧使) 고을’ 나주를 제치고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기 고 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해남읍은 태종 12년(1412)에 해진군 치소인 옥산현이 됐고, 세종 19년(1437)에 해남현과 진도군으로 분리되며 정식으로 현감이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해남현에 부임한 현감들은 죽산현에 자신보다 과거에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많아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리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현감이 문안인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언제까지 계속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비교적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장촌리에 살았다던 석천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신임 현감이 부임인사차 아침재를 넘었을지는 몰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자 했던 석천이 아침마다 현감이 문안인사를 오도록 했을 리는 만무하다.

 

임억령과 백령 형제의 엇갈린 운명

 

명종 즉위년(1545) 가을.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오라비인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렸다. ‘윤임·유관·유인숙이 수상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인종의 외숙과 그와 가깝던 대신들이었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 씨와 인종을,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 씨에게서는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 씨인데, 장경왕후의 아우 윤임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이 왕실의 외척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宗氏)이면서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에서는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불렀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 유관, 성세창 등 사림(士林)들을 대관(臺官)으로 임명하는 등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청류(淸流)로부터 배척받던 소인배들은 윤원형의 밑에 모여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때 석천의 동생인 괴마(槐馬) 임백령(林百齡, 1498~1546)과 구령(九齡)이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임백령은 꿈에 서경(書經)에서 출제될 것을 가르쳐준 선인을 만나고 거뜬히 과거에 급제했다는 야담의 주인공. 소윤에 가담한 그는 윤임과는 연적이었다. 역시 야사에는 윤임이 임백령의 정인(情人)인 기생 옥매향을 빼앗아 원한을 사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소윤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 일파를 반역 음모죄로 몰아 귀양을 보냈다가 사사한다. 이를 두고 세상은 이렇게 말했다. “노회한 이기, 치밀한 임백령, 잔혹한 정순붕, 독살스러운 윤원형이 간사한 동아리를 맺고 명사를 죽였으니, 하늘이 어찌 이러한가.”

석천은 동생을 말렸지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금산군수를 사직하고 해남에 은거한다. 외삼촌 박곤(朴鯤)에게 나란히 배우고, 1513년 임피현령으로 내려온 눌재 박상을 더불어 스승 삼았던 아우가 아니었던가. 그런 아우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무고한 사림을 죽음으로 내몰다니. 더군다나 눌재가 누구인가. 눌재는 임억령과 송순, 정만종 등을 가르쳤고, 이들의 문하에서 또한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니 호남 사림의 한 연원을 이룬다 할 수 있다. 특히 눌재는 중종반정의 세력들에 의해 쫓겨난 폐비 신 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멸문지화로 내몰렸으나 조광조의 도움을 받아 귀양을 가는 것으로 위기를 넘긴다. 이러한 눌재의 상소는 권력의 눈치를 보며 훈구세력에 몸을 사려온 사림들을 크게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그런 결기 있는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아우가 사림에게 비수를 꽂다니. 석천은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우가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그는 크게 분노하며 이를 불태워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임백령은 을사사화가 있었던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객사한다. 그리고 중상과 모략으로 많은 사림들을 사지로 내몬 임백령은 사후 선조 3년(1570) ‘을사간당’으로 몰려 훈작이 삭탈되는 수모를 당한다. 훈구와 사림의 오랜 갈등은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이어지며 많은 사림들이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선조의 즉위와 더불어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 득세하게 되는데, 이런 영향으로 사화에 희생된 사림의 신원이 이뤄진다. 그러나 득세한 사림도 이조전랑(吏曹銓郞) 문제로 내부 분열이 생기면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데, 이로부터 붕당정치가 시작된다. 2007년 3월. 고양시 벽제에 있던 임백령의 묘가 후손들에 의해 선산 임 씨 집성촌이 있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으로 이장이 됐다. 461년 된 산소를 파묘하니 관곽에 물이 차 있고, 관 속에 들어 있던 붉은색 명주 한 필이 물에 불어서 그대로였다. 육탈은 되었으나 윤기가 흐를 만큼 상투가 또렷하며 손톱과 발톱 또한 그대로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상 흉지에 묘를 썼던 것이다.

 

 

석천이 걸었던 그 길

 

아침재는 마산면 사람들이 해남읍을 왕래할 때 이용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마산면 상등리에서 면소재인 화내리로 넘어가는 꾸부럭재가 새로 나면서 아침재는 옛길로 밀려난다. 꾸부럭재는 일본인들이 이 길을 낼 때 꼬불꼬불하게 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비록 꾸부럭재에 밀려 인적이 뜸한 옛길이 되었지만 아침재는 꽃가마 타고 시집을 가는 새색시 마냥 수줍은 듯 설레는 길이다. 우리가 속도에 밀려 놓치고 살았던 여유로운 풍경이 그곳에 있다고나 할까. 아침재를 따라가다 보면 주막이 있어 주모가 반갑게 맞이하며 수다스런 몸짓으로 시원한 막걸리라도 내줄 것만 같은데. 무심한 세월따라 인정마저 멀어지고 말았으니. 장촌리에서 은적사를 가다보면 중간에 석천의 묘가 있다. 해남에서 태어나 해남에 묻힌 석천. 해남읍 해리 금강골에 해촌사(海村祠, 해촌서원)가 있다. 본래 효종 3년(1652) 임억령을 모신 단독 사우로 건립하였으나 숙종 15년(1689) 해남유림의 발론으로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을, 1721년 귤정 윤구와 고산 윤선도를 추배하여 5현사가 됐다.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가 1901년에 복원됐으며 1922년에 취죽헌 박백응이 추가로 배향됐다.

무려 300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남긴 석천 임억령. 그 많은 시 가운데 ‘시우인(示友人, 친구에게)’은 석천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옛 절 앞에서 또 봄을 그냥 보내는데/ 남은 꽃잎 비 맞아 내 옷에 떨어져 붙네/ 돌아오니 소매 가득 맑은 향기 남아/ 무수한 산 속 벌들이 사람 따라 멀리 왔네.’

생전에 석천도 장촌리 별서(別墅)를 나서 아침재를 걸었을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의 근원은 아마도 아침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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