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한국)·장제스(대만)·덩샤오핑(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도약을 이끈 1세대 창업형 지도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리콴유(李光耀·91)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독립 50주년(8월 9일)을 앞두고 지난 23일 세상을 떠났다. 국부(國父)를 잃은 싱가포르 국민은 큰 슬픔에 빠졌다.
 

리콴유는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통치하던 1923년 9월 16일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이주한 화교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났던 그는 악착같이 공부해 명문 래플즈대 장학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뒤이어 2차 대전이 터지고 일본군이 고향을 점령하자 그는 일본군 선전·정보부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고무풀 장사 등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일본 점령기 경험에 대해 “정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시기”라고 회고했다.

리콴유는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유학을 떠났고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유학 시절 접했던 영국의 선진 문물과 학문 그리고 그 안에서 겪었던 아시아계 인종에 대한 차별 등의 경험으로 고향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1950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노동 전문 변호사로 영국 측 사용자들과 아시아계 노동자들 사이 쟁의를 잇따라 타결시키면서 동족의 이익을 대변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고, 1954년 창립한 ‘인민행동당’의 사무총장직을 맡는다.

1959년 싱가포르가 자치권을 얻어낸 뒤 실시한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리콴유는 이해 초대 총리가 됐다. 서른여섯 살 때였다.

그러나 곧장 시련이 닥쳤다.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말레이 연방에 가입했지만 연방의 맹주 말레이시아와 충돌하다가 2년 만에 탈퇴했다. 이때부터 리콴유 정치 노선의 핵심 키워드로 꼽히는 실용주의가 빛을 발했다. 이 결과 1965년 말레이시아연방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00달러 수준이었던 싱가포르의 지난해 1인당 GDP는 세계 15위인 4만3117달러로 세계 무려 100배 이상 늘어났다.

올해는 인구 500만명인 싱가포르의 전체 GDP 규모가 인구 2750만명의 말레이시아를 넘어설 것이란 것이 IMF(국제통화기금)의 전망이다.
그에게는 ‘독재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리콴유는 “서구의 민주주의는 아시아에 맞지 않는다”며 통치 이념으로 ‘유교적 권위주의’를 내세웠다.

사회 규율이 엄혹하고, 집회·결사 등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아들 리셴룽(李顯龍·63)이 2004년 3대 총리로 취임하자 세습 논란도 있었다. 63년을 해로한 부인 콰걱추(柯玉芝)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에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2013년 발간된 자서전에서 그는 ‘날마다 몸이 약해져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도 털어놨다.

2011년에는 미리 가족에게 “죽거든 지금 사는 집을 절대 기념관으로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헐어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국강병을 실현한 실용주의 정신을 유언에 담은 것이다.

“인도 초대 총리 네루나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집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결국 폐허가 됐다”며 자신은 집을 남겨둠으로써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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