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 왜군포로수용소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문화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갖는 역사의 현장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재지사학계는 물론 이곳을 답사하고 현장을 확인한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포로로 잡힌 왜군들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 왜군포로수용소가 해남에 있었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지난 1980년대 초반의 일로 그동안 근거가 된 자료에 의해 수용소 터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를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정설로 굳어진 이른바 ‘어란의 여인’에 대한 홀대와 함께 해남군의 역사문화에 대한 옹졸한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다.

안내표지판도 없는 왜군포로수용소

해남에 왜군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얘기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일본에 있는 ‘해남회’ 회장이던 다니구치 노보루(谷口登)씨가 현재 해남 노인회장인 김광호 씨에게 사와무라 하치만타로(澤村八幡太郞)의 기록물을 전달하면서다.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순사로 있던 사와무라는 역사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알려진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일본판 기록인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1879~1951)의 저서인 ‘문록 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분로쿠 케이초노 에키)’에 근거하여 잡기 형식으로 정리한 사와무라의 노트는 당시 해남문화원장이었던 고 황도훈 씨에게 전달됐고, 황 원장은 이 노트를 토대로 1983년 신문에 소개하면서 왜군포로수용소의 실체가 처음 공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황 원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노트에 기록된 정확한 사실도 묻혔다가 현 해남회 회장인 세키 준이치(瀨木俊一)씨가 송지면에 거주하는 재지사학자인 박승룡 선생에게 사와무라의 유고집을 보내오면서 왜군포로수용소와 어란의 여인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실체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와무라가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이케우치가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데다 사와무라 자신도 일제 순사로 비록 역사에 상당한 식견을 가졌다고는 하나 구체적인 실체 확인에 대한 다소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어란의 여인은 물론 왜군포로수용소 설도 평가절하 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일부 사학계의 편협한 시각은 자칫 역사에 대한 정당한 성과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정통으로 역사를 연구한 사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의 성과물을 외면하려 든다면 과거 식민사관에 얽매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국내 사학계의 역사 인식은 어떻게 설명이 되겠는가.

아직까지도 일부 사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얽매여 우리의 강역을 한반도에 비정하기 급급한 면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학계의 병폐는 우리의 역사관을 왜곡시키는 암적인 존재나 다름이 없다. 위대한 고고학 발견은 전문적인 학자보다 비전문가인 아마추어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 이상 발굴할 것이 없다던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서 이집트 소년왕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는 무덤벽화를 모사하던 수채화가였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해독한 조지 스미스는 지폐인쇄공이었고, 고대 마야제국을 발견한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법률가 출신이었다.

트로이를 신화에서 끄집어낸 하인리히 슐리만 역시 고고학과는 거리가 먼 상인이었다. 이들이 이러한 위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충분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열린 사고로 천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외면하면 미래는 없다

땅끝으로 가는 길에 도로변은 모 방송국의 예능프로인 ‘런X맨’ 촬영지를 알리는 입간판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역사적인 왜군포로수용소에 대해서는 변변한 안내표지판 하나 세워놓지 않고 있는 것에 비춰볼 때 이러한 얄팍한 발상은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하다.

또한 단지 드라마를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허준의 유배와는 전혀 사실이 없는 장소에 적거지(謫居址)를 재현해 놓고 이를 알리는 입간판을 세워놓기도 했다. 이처럼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해남군이지만 호국의 여인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진 어란의 여인과 왜군포로수용소에 대해서만은 왜 그토록 인색한 것인지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군들의 무덤이 있는 진도 왜덕산에는 이를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명량은 조선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승리였다. 이러한 명량의 평가는 어란의 여인과 왜군포로수용소라는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탁상머리에서 갑론을박이나 일삼는 역사문화에 대한 인식은 결코 바람직스럽지가 않다. 장성군과 곡성군의 경우 소설 속 인물인 홍길동과 심청을 내세워 축제까지 열고 있는데 이와 달리 실존인물이라는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 어란의 여인과 왜군포로수용소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직무유기요, 업무태만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고 했다. 어란의 여인과 왜군포로수용소야 말로 가치 있는 해남의 역사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제대로 된 대접을 위한 해남군의 명쾌한 결단을 바란다.

저작권자 © 해남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