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지극히 추상적인 그 말은 경험의 과정을 거치면 구체성을 띤다. 우리 집 두 녀석이 유치원 다니던 무렵, 한 이불 속에서 이야기 나누다 꿈길로 떠나곤 했던 기억이 내겐 행복의 순간이었다. 재잘거리다 깔깔대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어여 자자.’ 같은 말 몇 번씩 반복하다 까무룩 잠 속으로 빠져들던 그때.

“엄마, 오늘 이야기는요?”
밤마다 새 이야깃거리를 장만해야 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끝없이 불러달라는 자장가에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생각하면 그게 다 행복이었던 거다.
아기 땐 얼른 커서 눈 마주치며 이야기 나누길 꿈꿨고, 더 크니 주거니 받거니 일상의 이야기 함께 하길 바랐다. 좀 더 크니 진중한 인생 이야기는 언제쯤 할까 새로운 바람이 생겼다. 가만 생각해보니 현재 나누는 이야기보다 뒷날 나눌 이야기에 가치를 두며 살았다. 이런 미련한 지고.

그럼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된 지금은?
“오늘 하루만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
독립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녀석들의 바람은 한결 같다. 너무 의존적인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부모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그런 거라고 위안을 삼는다. 밤마다 두 녀석 방을 차례로 들러 위문 방문을 해야 엄마 소임이 끝난다.
“제 옆에 10분만요!”
간절한 눈빛을 발사하는 딸 곁에 누웠다. 팔베개를 해주고 꼭 끌어안았다. 다 큰 녀석이 가슴팍을 파고든다.
중학생이 된 뒤 살이 빠지고 얼굴에 허연 버짐까지 핀 우리 딸. 학교로 학원으로 종종거리며 바삐 다니면서도 언제나 생글거리는 기특한 우리 딸.
“힘들지?”
배시시 웃는다.
“너는 나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는 낫다.”
“뭐가요?”
“늘 웃잖아 우리 딸.”

그렇게 우리는 함께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이야기, 내 어린 날의 추억, 나의 엄마 이야기,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까지. 허무 개그도 하나씩 기억했다 깔깔대기도 하면서. 옛날부터 궁금했던 질문도 슬쩍 끼워 넣는다.
“잔소리 안 하는 엄마 되기가 내 목표인데 네가 보기엔 어때?”
“음....... 그러니까....... 말이죠.......”
말 안 해도 다 안다. 그 줄임표에 숨어버린 네 진심. 내년엔 잔소리를 좀 줄여야겠다.

아, 이게 또 행복이구나. 함께 덮은 이불 속에서 다 큰 딸이 엄마 귀찮다 않고 도란도란 말 상대 되어주니 복이 많구나. 많은 이야기 나누진 못해도 내밀한 속내 들여다볼 수 있어 좋구나. 무시무시한 ‘중2병’에 걸리지 말고 내년에도 좋은 말벗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딸은 클수록 친구가 된다더니 맞는가 보다. 녀석이 싫다고 해도 악착같이 옆에 빌붙어 누워볼 생각이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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