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 맞다. 10년 넘게 소식 없던 사람의 연락을 받으면 긴장부터 한다.
“잘 살지? 수술하고 쉬는 중이야.”
불쑥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말문이 막혔다. 짐작대로 암이라고 했다.
“궁금하고 또 보고 싶어서.”
죽음 언저리를 서성이게 되면 추억속의 벗이 떠오르는 건 인지상정인가 보다. 아마 나도 그럴 것 같다.

요 며칠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들려온다. 가수 신해철의 갑작스런 죽음. 이탈리아 취재 중 심장마미로 운명을 달리 했다는 한겨레신문사의 구본준 기자. 모두 내 또래의 사람들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세대로서 연대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들으며 뭉클했고, 그가 쓴 건축 기사를 골라 읽으며 행복했다.

두 사람 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 앞에 불려갔다. 애틋한 눈으로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고, 정리하지 못한 일상을 그대로 둔 채 황망히 떠나갔다.
어느 날 불현듯 내 앞에 놓일 나의 죽음. 그게 내일의 일수도 있고, 그 보다 먼 나중의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지고 온 죽음의 이름표를 언젠가는 분명 달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려보고는 한다. 나이 백 살이 되던 해, 곡기를 끊고 의식이 맑은 상태에서 죽음 쪽으로 향하는 자신을 지켜보며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맞이한 스콧 니어링. 청빈한 공동체를 일궜던 그의 삶처럼 정갈한 죽음이다.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죽음이며 근사한 마지막이다.

불교에는 이승의 삶을 마치고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뜻에서 천화遷化라 불리는 죽음이 있는데 이는 죽음 이후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특징이 있다. 죽음을 앞둔 옛 스님 중에는 인적이 끊긴 산중으로 남루해진 육신을 끌고 가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는 했다. 기운이 남아 있으면 주변에 흩어진 낙엽을 모아 이승에 남은 흔적을 온전히 지운 채. 수행자다운 마지막이라 여겨 많은 이들이 바라는 죽음이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임동창도 죽음이 임박하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서 죽을 터이니 찾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임동창다운 선전포고다.

나도 멋지게 죽고 싶다. 최소한 초췌한 모습으로 링거를 꼽은 채 병원에 의탁해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더 살아보겠다고 수술하고, 좋은 약 골라먹고, 애걸복걸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고통 앞에서, 죽음 앞에서 엷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묵묵히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콧 니어링처럼 죽음마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내공이 있었으면 좋겠다. 꿈이 야무진가? 그런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잘 살아보자. 그러다보면 잘 죽을 방법도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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