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제주를 오가던 배가 뜨던 관두량, 지금은 옛 영화의 흔적은 없고 김 양식장만이 관동포구 앞바다를 지킨다


관동포구를 찾아간 날은 늦은 가을비가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바다는 애잔했고, 포구는 쓸쓸했다. 관두량(館頭梁). 고려시대 중국과 교역을 하고, 북평면 이진(梨津)과 함께 해남에서 제주로 가는 항구로 번창했던 고대 해양도시. 그러나 오늘날 관두량은 옛 영화를 뒤로한 채 삼마도를 오가는 고깃배만 드나들 뿐, 한적한 어촌의 풍경으로 남아있다. 이곳 관두량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10여년 전 관두산 용굴동 풍혈이 매스컴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다. 그 때의 기억으로 다시 찾은 관동포구는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그러나 낯선 느낌으로 묵묵히 나그네를 맞아준다.

고려시대 해양도시였던 관두량의 영화는 간 데 없고

관두량을 제대로 맛보려면 무학리 쪽에서 관두산 임도를 타고 관동으로 도는 길을 추천한다. 대섬으로 시작해서 멀리 삼마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 길을 해안도로로 개발해 관두량의 영화를 재현해보면 어떨까. 풍경에 매료된 상념은 꼬리를 문다. 고려시대 송나라와의 교역항이던 관두량은 중국 문화를 활짝 꽃피웠던 송대의 문물을 가장 먼저 흡수한 개항지였다. 송대는 나침반과 화약, 인쇄술 등 중국의 3대 발명품이 나온 창조적인 문화의 시대였다. 물론 도자기문화도 발달한 이 시대에 중국과의 교역은 단순한 물자의 교환,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고려문화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해남현은 현산면 고현리에 있었다. 관두량을 통해 들어온 중국문물을 가장 빠르게 흡수하며 번창한 곳이 해남이었던 것이다. 이곳 관동은 물론이려니와 현산 백포만과 백방산 일대에는 중국과의 교류의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흔적들은 대체로 비애의 흔적이다. 낙화암, 망부석 등 쇠락한 역사는 야사가 되어 빛바랜 전설로 남는다는 것을 이곳에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이 신성시했던 큰댓골 ‘이순신장군 수결바위’

이번 관동행의 목적은 해남의 숨은 보석 ‘큰댓골 해안’을 찾아가려는데 있었다. 그런데 때로 사람의 기억이란 모호한 것이어서 큰댓골을 찾아가는 길에 대한 기억은 이미 지워진 상태다. 그나마 남은 기억으로는 용굴동이 추운 겨울이면 더운 김을 뿜어내는 풍혈로 신비롭다면 큰댓골은 기기묘묘한 돌들로 거대한 수석전시장을 연상시키는 이색지대라는 것. 그러나 용굴동에 가려진 면도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큰댓골은 해남 사람들도 잘 모르는 돌들의 천국이다. 비경이 그러하듯 쉽게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기분이다. 바닷가에 누운 거석들은 대체로 검은 빛을 띠고 있으며 벼락을 맞은 듯 깨진 바위와 콘크리트로 버무린 듯 자갈들이 박힌 바위, 그리고 큰 손바닥 모양으로 파인 ‘이순신 장군 수결(手決)바위’가 눈길을 끈다. 바위에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갖다 붙인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성시했다. 물론 바위에 올라가는 일도 금했다. 바위에 장군이 손도장을 찍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관두량에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남긴 해학(諧謔)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마을 주민들은 외부에 알려지는 걸 꺼렸다. 사람 손이 타면서 지천이던 몽돌도 귀해졌다는 것이다. 관두산에 임도가 나면서 굴참나무 군락이 훼손됐고 그 많던 동백나무도 무더기로 반출됐다. 그러니 이곳이 알려지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으리라.

‘표해록’을 쓴 최부가 제주로 가는 배를 탄 관두량

삼마도로 가는 도선 개통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선착장 마무리 공사가 진행중이고. 바다는 생업인 김 양식장으로 바뀐 지 오래다. 관동은 해방 후 미군정시절에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그 옛날 바다는 육지로 변했다. 방조제 인근에는 관(館)터와 영(營)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민가와 공장이 들어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제주로 떠나기에 앞서 순풍을 기다리던 곳으로 해남의 관두량, 고어란포(古於蘭浦,화산면 연곡리), 입암포(笠巖浦, 화산면 가좌리), 영암의 해월루(海月樓, 북평면 남창리)등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 관두량에는 제주를 드나들던 사람들을 위한 숙박관소인 ‘해진성관(海珍城館)’이 있었다. 관두량은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가 제주로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금암은 제주에서 부친상으로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다 풍랑을 만나 중국으로 표류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표해록(漂海錄)’을 썼다. 관두량에서 제주 조천관까지는 970리 뱃길이었다. 순풍이 불 때 꼬박 1박2일이 걸리던 뱃길이지만 풍랑으로 인해 여의치가 않았다. 관두량은 한양 사람들이 학질을 떼려고 ‘해남 관머리’를 외쳐댈 만큼 ‘땅끝 불귀(不歸)의 땅’으로 불렸다. 당시의 바다는 중국으로 떠나든 제주로 떠나든 돌아올 기약을 할 수 없는 험로였다.

잡초만 우거진 관두사터에 무심한 가을비는 내리고

 
여전히 비가 내린다. 이처럼 비가 내리는 날, 관두량의 흔적을 더듬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해양도시로 번창했던 만큼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던 절도 있었다. 6.25때 불에 타 지금은 터만 남은 천년고찰 관두사가 그렇다. 백제 때 창건한 걸로 알려진 관두사는 관두량 바닷가 절집이었다. 바닷가 절은 대개가 관음성지다. 양양 홍련암,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힌다. 여기에 여수 향일암을 더하기도 한다. 역시 바닷가 절로는 김제 망해사가 있다. 바다를 바라다보는 절집인 망해사 전망대에서는 바다의 수평선과 김제평야의 지평선을 동시에 바라다 볼 수가 있었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의 건설로 바다가 사라졌지만 이곳에서의 낙조는 여전히 장관이다. 아마도 관두사도 승려와 신도들로 북적이던 절집이었을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절터에는 잡초만이 무성하고, 약수만이 길손들의 갈증을 달래주고 있다. 그리고 다시 비 내리는 관동포구. 문득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시가 생각난다. 제주 경차관으로 부임하면서 이곳 객관에서 배를 기다리던 청음. 그때도 비는 내렸고, 심사는 울적했으리라. 관두량에서 아침을 맞은 청음은 바다를 보며 ‘관두조기(館頭眺起)’라는 시를 ‘남사록(南槎錄)’에 남겼다. ‘먹구름은 뿌옇고 빗소리는 쓸쓸한데/ 책상위의 문서 또한 쓸쓸하네/ 문을 닫고 홀로 누워 종일토록 잠을 자니/ 한남(漢南)으로 돌아갈 꿈 멀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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