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엄마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어야 합니다. 초등학생 때는 따라 배우는 시기이니 모범을 보여야 하고요. 사춘기가 되면 홀로 설 준비를 하는 때이니 뒷짐 지고 서서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20살이 넘으면 가차 없이 정을 떼야 해요. 그때부터는 남의 자식을 바라보듯 무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륜 스님 법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모로서 이런저런 상담거리를 풀어놓으면 스님은 언제나 이 답을 들려주신다. 결혼도 해보지 않은 스님께 자식 키우는 고충을 묻는 것도 얄궂지만 열 자식 키운 경험자보다 더 명쾌한 답을 내놓으시는 스님도 범상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6학년 아들과 중학교 1학년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스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머리 속 이마에 부모 된 자의 지침으로 깊게 아로새겨진 가르침이다. 주변의 이야기에 이끌려 줏대 없이 흔들리다가도, 내가 정말 부모 노릇 잘하고 있나 수없이 번민하다가도 결국 이 가르침 자리로 돌아와 평화를 찾고는 한다.

 “우리 딸은 청개구리 같아. 내가 말하면 무조건 반대로 해.”
딸이 등교를 한 뒤 남편의 표정이 심각하다.
“머리를 풀면 예쁘다고 했더니 싫어 싫어 그러면서 묶고 가잖아.”
상대가 화나 있을 때는 딴지를 거는 건 도리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꿀꺽 삼키고
“고 가시내는 왜 아빠 말을 안 듣고 그래!”
하며 남편 역성을 들어준다.
“더 예뻐 보이라고 그런 건데, 다 저 생각해서 그런 건데 하는 짓짓이 맘에 안 들어.”
“아빠의 감각을 뭘로 보고 말이야.”
한 번 더 맞장구를 쳐주며 화난 남편의 마음을 풀어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고분고분 했던 딸이다. 하지만 내가 봐도 밉상 짓을 많이 한다. 불쑥불쑥 치미는 화에 불을 댕기는 언사가 잦다.
바꾸어 생각하면 이제 제 깜냥의 잣대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생겼다는 말이다. 반가운 일이다. 뒷짐 지고 지켜보아야 하는 때인데 자꾸 개입하려드니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나는 ‘잔소리 안 하는 엄마 되기’가 엄마로서 목표다. 일거수일투족 간섭하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그것도 다 엄마의 애정 표현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나는 숨 막히도록 싫었기에 오죽하면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을까. 그래서 내 딸에게 만큼은 잔소리 안 하는 엄마가 되기로 작심했다.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부모의 무심함 속에 자란 내 남편은 살뜰하게 챙기고 어여쁘게 말 건네는 아빠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딸의 머리카락도 잘라주고, 무거운 가방도 들어다주고, 신발도 깨끗하게 빨아주고, 시험 기간에는 옆에 앉아 공부까지 챙겨주는 그런 딸바보 아빠다.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하는 아빠다. 눈물겨운 아빠의 사랑에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룩한 거니까.

하지만 사랑의 가치는 주는 사람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이쪽에서는 넘치는 사랑을 주지만 받는 쪽에서 부담스러워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 엄마와 나 사이의 어긋난 사랑처럼 말이다.

“내 자식이지만 남의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때예요. 큰 일 아니면 그냥 지켜봅시다. 나는 우리 딸이 스물 살이 되면 남의 자식이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진심으로.”
오매불망 딸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못하는 남편에게 차마 말 못하고 꿀꺽 삼킨 말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시시때때로 간섭하려드는 내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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