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 이우’는 능청스런 입담과 해학으로 이문구, 성석제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으로 주목받아온 김종광 소설가가 김종광만의 문체로 쓴 첫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이우의 삶을 “일제강점기 조선어 신문에 ‘이우공’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기사”를 바탕으로 능청스럽게 사실이 기록된 ‘실록’처럼 되살려 냈다. 작가가 참고한 기사는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중앙일보」 「중외일보」의 224건으로 “대부분의 기사는 단신으로 이우의 행적을 보도한 것이다. 장문의 기사는 몇 건 되지 않는다.

한반도는 유사 이래 왕조의 나라였다. 마지막 왕조인 조선 이왕가가 통치한 세월만 무려 519년이었다. 이씨왕조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제국 13년으로 마감되는데,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 36년 이후, 해방공간에서 이왕가의 인물들이 정치권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세계 역사에서 이처럼 깨끗한 ‘왕조 청산’은 드물다.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역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서, 해방 이후 구왕조의 인물이 새 조국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예를 적잖이 찾을 수 있다. 구왕조의 인물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새 조국 건설기에 각계각층 세력의 조율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대중의 지지를 받을 만한 구왕조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우(李?)다.

『왕자 이우』에서 작가는 자주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왕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조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알아들었다 해도 천황이 떠들어댄 소리가 ‘해방’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다수 조선 사람은 뜨거운 정오에, 어리둥절하게, 해방을 맞이했다.”(본문 363쪽) 작가는 또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분열, 신흥세력인 자본가들의 등장 등 해방 전의 조선 사회를 각 정파와 세력을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통합하려는 ‘이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기득권층과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진 이들에게 몰락한 왕조의 후계자 이우는 몽상가이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이우
이우는 경술국치 2년 후인 1912년 광무제(고종)의 5남인 의친왕의 차자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새 주인이 되었다. 10살이 되던 해, 일제에 볼모로 잡혀 학습원을 거쳐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했으나 조선말로 화를 내고 조선노래를 부르는 등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끝까지 저항하여 대한제국의 황족 중 유일하게 조선인과 결혼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던 1945년 8월 6일에 피폭되어 8월 7일 사망하였고 장례식은 일제가 항복 선언을 하던 1945년 8월 15일에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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