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으로 이사 오고 햇볕과 바람이 참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세삼 한다. 햇볕 좋은 날은 그냥 보내기 아까워 뭐라도 일거리를 만들고는 한다. 건조가 잘 되려면 햇볕을 타고 노니는 바람이 적절히 찾아와 주어야 또 제격이다. 그리하여 여름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여러 날 이어지던 한가위 연휴에 벼르던 부각 만들기를 착수했다. 하늘 눈치만 살피다 미뤄둔 일이다.
불린 찹쌀을 믹서에 갈아 쌀죽부터 쑤고, 감자는 얇게 썰어 끓는 물에 익혀 물기를 빼둔다. 김은 잡티를 골라 한 쪽에 놓아두고, 물기 빠진 깻잎도 채반에 받혀둔다. 그리고 마당 한가득 멍석을 깐다. 앞치마를 두른 채 갓 볶은 통깨를 들고 마당에 나서면 부각 만들 준비는 끝이다.
은근히 바깥 나들이를 기대했던 두 녀석을 호출하니 싫은 내색 않고 달려온다. 무슨 일이든 놀이로 접근하는 녀석들의 본성이 발동한 결과다.
“나는 쌀풀 바른 거 옮길 게요.”
“그럼 난 통깨 뿌리기.”
녀석들은 저희끼리 역할 분담도 척척.
“나는 뭐 도와주면 돼?”
아침 내내 쓸데없는 일 만든다며 잔소리 늘어놓던 남편이 상냥하게 물어온다.
“당신은, 당신 일 하세요. 우리 셋 환상의 팀이걸랑요.”
고맙지만 남편의 호의는 거절. 부각 한 장마다 핀잔도 한 바가지씩 따라올 게 뻔하다. 머쓱해진 남편은 텃밭에서 베어온 아마란스를 갈무리하겠다며 그늘을 찾아 앉는다. 한가위 연휴 끝자락, 우리 집은 작은 공장 같다.

김을 반으로 접어 겹으로 쌀죽을 발라 건네주니 환이는 열을 지어 가지런히 놓는다. 혹여 줄 간격이 틀릴까봐 손 자로 거리를 재는 치밀함이란. 역시 꼼꼼한 우리 아들이다.
“김 20개 모아지면 불러.”
라며 아빠 옆에 앉아 딴청 부리던 인이가 환이 손짓에 달려와 통깨를 뿌린다.
“통깨 아깝다. 조금만 쳐야.”
환이가 엄마 말투로 누나에게 통박을 놓는다. 가만히 지고 있을 인이가 아니다.
“엄마가 한 명 더 계시네요.”
둘은 옥신각신 하면서도 제 몫을 다 한다. 서로의 일이 지루해질 무렵 역할을 바꿔가며 싫은 기색 없이 즐겁게 일을 한다.
“부각 만들기 끝!”
그렇게 김 3톳과 감자 30개, 깻잎 100장까지 장장 세 시간에 걸친 부각 만들기가 끝이 났다. 혼자 했으면 훨씬 더디고 힘들었을 일이 협동하고 나누어 한 덕에 수월하게 끝났다.
“엄마가 아이스크림 쏜다!”
군소리 없이 도와준 녀석들이 참 고맙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꾸들꾸들 마른 김과 감자 몇 개 가져다 기름에 튀긴다. 점심상에 내놓으니 녀석들 엄지손가락이 올라간다.
“엄마는 요리 박사!”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아저씨는 뉘신데 남의 집에서 부각을 맛나게 드신데요?”
김부각에 자꾸 손이 가는 남편을 흘겨보니
“아들, 냉커피 한 잔!”
딴청이다.
우리 집 마당엔 풍성한 가을이 여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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