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당기는 게 아니라 숫제 시詩가 ‘땡긴다.’ 찐하게 시 한 잔 마시고 싶다. 정호승과 도종환과 신경림과 이시영 그리고 나희덕의 시까지 한데 버무려 인상불성이 될 때까지 흠뻑 취하고 싶다.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가 신 새벽 세상을 향해 시어詩語로 쏟아내는 고성방가를 하고 싶다.
밤이면 풀벌레 쓸쓸히 울고, 서늘한 바람 폐부를 스치고 지나가서인가? 아니다. 계절과 상관없는 일이다. 시를 향해 미치듯이 날뛰는 이 심장은 필시 나이 들어가고 있음의 증거이다.
시는 한때 광장의 언어였고 젊은이의 뜨거운 몸짓이었다. 연대의 깃발이 되어주었고, 칼보다 더 날선 칼날을 세우고 진격해 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시는 젊은이의 언어가 아니다. 나처럼 조용히 침묵하며 나이 들어가는 이의 읊조림, 푸념 섞인 혼잣말에 더 어울린다.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내가 시집을 꺼내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나 손닿을 가까운 곳에 시집 한 권씩 놓아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혀 의식한 일이 아니었다. 그게 또 싫지 않아 어느 날은 온종일 시집을 읽고는 했다. 큰 소리 내 읽다보면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듯 낭랑한 목소리에 실려 시의 맛이 새로웠다. 햇살 좋은 마당에 앉아 온 몸을 조용히 흔들며 시가 건네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황홀했다. 일순간 사는 이치가 몰록 깨달아졌다가 좀스럽게 사는 내가 가여워졌다가 맑고 투명한 수정 같은 물로 온 몸이 채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과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도종환 [산경] -

시는 수다스럽지 않아서 좋다. 귀가 아플 일이 없어서 좋다. 행과 행 사이에 쉼표가 있어서 좋고, 그 쉼표 사이에서 마냥 머물며 노닐어도 상관할 이 없어 좋다.
늦은 밤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읽지 않아도 되니 그도 좋다. 한 밤 내 소설 한 권 거뜬히 읽어낼 체력과 시력을 갖지 못한 나이가 되고 보니 만만한 시가 편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벼운 몸짓의 시가 기실 태산의 무게를 담고 있기에 나는 시가 좋다.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음’을 이리도 고요히 그러나 온 몸 전율케 말해줄 이, 시인 말고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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