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안소니. 노랑 곱슬머리를 한, 캔디에겐 언제나 친절했던 남자. 장미를 사랑했던 로맨틱한 남자. 뭇 친구들은 반항아 테리우스가 더 멋지다고 했지만 나는 가슴 따뜻한 안소니가 더 좋았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내 가슴에 설렘으로 자리했다. 이럴 수가! 만화 영화 속 주인공을 사랑하다니! 그건 분명 내 첫사랑이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들장미 소녀 캔디’ 시디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요일 아침 8시면 어김없이 했던 그 만화영화.
“밥은 안 차리고 뭐한다냐! 테레비 속으로 아조 들어가거라잉.”
어김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언제나 나를 달뜨게 했던 그 만화영화.
“엄마, 빌려가요.”
“너도 보고 싶어?”
“엄마랑 같이 봐요.”
그날부터 우리는 밤마다 몇 편씩 보곤 했다.
“엄마, 딱 한 편만 더 보고 자면 안돼요?”
연작으로 이어지는 사건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때 쯤 편 수를 달리하며 끝이 났다. 감질 맛났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어요.”
인이 말에
“근데 캔디는 화장실도 안 가나봐. 아예 화장실도 없어요.”
엉뚱한 환이의 지적까지 잠자리에서도 캔디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우리는 캔디 주제가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만큼 나도 인이도 환이도 캔디에 푹 빠진 것이다. 지금 애니메이션과는 표현에 있어 수준 차이가 크게 났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눌 거리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안소니보다 발명왕 스테아가 더 멋진데 캔디는 안소니만 좋아하더라.”
“캔디는 바보야. 닐이랑 이라이저 같이 못된 녀석들이 괴롭히는데 왜 참기만 해?”
“근데 사람들은 다 캔디를 좋아해. 처음에는 싫어했어도. 그게 참 신기해. 그치?”
“난 너구리 크림이 사람처럼 말을 알아듣는 게 신기해.”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녀석들의 평가는 끝없이 이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차원’이 다른 혼자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 ‘왜 일본 작가가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 이야기를 쓴 거야?’ 하는 의문. 어렸을 땐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다.

한 달이라는 대장정으로 만난 캔디. 드디어 마지막 115편을 다 봤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
환이는 정말 살맛을 잃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가슴 여기에 바람이 들어온 것 같아.”
인이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한 숨을 쉬었다.
“윌리엄 큰아버지가 알버트씨라니 놀랍다.”
“그럼 알버트씨랑 캔디는 결혼하는 거야?”
두 녀석은 금세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흥분했다.
“엄마, 근데 캔디는 15살 밖에 안 먹었다면서요? 왜 꼭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 이름을 불러요? 왜 꼭 이름 뒤에다 씨자를 붙이는 거예요? 건방진 거 아니에요?”
환이의 날카로운 지적까지 등장인물들은 우리 세 사람에 의해 낱낱이 해부되곤 했다.
캔디 덕분에 한 달이 행복했다. 캔디 덕분에 30년 전 첫사랑의 설렘을 다시 느꼈다. 무엇보다 우리 집 두 녀석과 함께 즐겁게 보았다는 사실이 유쾌하다. 다시 이런 추억의 만화영화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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