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다겉절이는 겉절이대로 시면 신대로 걸쳐 먹든 비벼 먹든 한 볼때기를 해야 제대로 먹은 것같다 그러니 혼자 있어도 한 그릇의 밥을 다 감당할 수 있다 다른 반찬에 눌려 있는지 없는 지 모를 때도 있지만 몇 끼라도 보이지 않으면 밥에도 힘이 죽고 식사를 건너 뛴 것처럼 허전해진다언제나 같이 있어 너무나도 편한 존재 겨울을 건너려면 김장 김치를 해서 독에 담궈야 한다항아리도 정성을 다해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법 우수·경칩이 지나 땅이 풀린 직후의 흙을 빚어이른 봄에 처음 구운 독이
이웃들이 사라지고 있다 텃밭에 방울토마토 한 소쿠리 주던 웃음들이 사라지고 있다 상추에 돼지갈비, 같이 먹자던 수더분한 얼굴과 평상이 사라지고 있다 같은 입구를 들락거리는 30세대가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개, 닭 보듯 멀뚱멀뚱 앞집이어도 누가 사는지 모른다 시간들이 사라지고 있다 차 한 번 해, 내 연락할게 가을 가도록 전화도 못하고 언제 식사 한 번 하자 삼 년 지나고 오 년이 그냥 지났다 토막 난 시간들이 바쁘다 바뻐 이리저리 흩어진다 오줌 눠도 털 시간도 없다며 투덜거리며 울을 넘어간다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다졸졸 거리는 물소
사람들 마음속에는 완악함이 있어 말씀을 언제나 거부하지 동으로 가라하면 서로 가고 때로는 움직이지도 않지 먹으라하면 뱉어내고 입술을 내밀기도 하지 좁은 길과는 다르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 같은 이야기를 쫓지그러니 말씀을 전하여 강 이쪽으로 건너오게 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 미운 것과 슬픈 것 삼각자와 저울, 시계와 창문도 다 버려야 하네 비를 맞으며 서서 기다리는 나무가 되어야 하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품어야 가능한 일 지워진 길을 찾아내는 지순한 사랑과 철판 같은 마음을 뚫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하네 때를
넓지 않고 높지 않아도 편안한 어머니 무릎 같은 반질반질하게 닦아둔 벌러덩 그냥 눕기도 하고낮잠을 한잠자기도 하던 만만하고 쏠쏠한 자리 여름밤엔 별들이 싸라기 한 섬 뿌리고 지나가기도 하는 밥상을 차려 물 말아 밥 한 술 떠 넣다 물끄러미 멀뚱멀뚱 쳐다보는 개똥이 얼른 된장국에 밥 말아 갖다 주고 와서 풋고추 된장 찍어 먹어도 되는 다 돈을 사도 늘 푼돈인 들깨, 수수밭 같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자유적립식 IMF 통장 같은 상추쌈 입 미어지게 쓸어 넣고는 문 밖 우물가 보기 민망해서하늘 한 번 보고 우물거리고 장독 한 번 보고 쭈물거
향긋한 깻잎에 감기는 황토 텃밭의 누릇한 햇살도 햇살이지만 그의 입술에는 아삭하게 씹히는 야채와 같은 가을 이야기가 있어 좋다 무엇보다 싱싱하게 차오르는 시월 강의 힘줄 같은 싱그러움이 있어 자꾸 눈길이 머무르는 부두 뱃고동의 누긋한 회귀선이 포물선을 그리고 새콤달콤 초고추장으로 버무려낸 대청마루 같은 그리움이 아미에 엷게 떨린다얇게 포를 뜨고 있는 10월 햇살들 무량한 인사말을 다 뒤에 감추고 굵게 채를 썬 무와 배, 어슷하게 썬 붉은 고추달큼한 오후를 모두 버무리고 있다 한 접시면 없던 입맛도 돌아오고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
바위에 새긴 그림이 수수 천년 살아있다 한 사내가 두 팔 들어 뭔가를 살피고 있다 성기를 다 드러낸 채… 등 뒤에는 거북 세 마리, 고래 떼가 사내를 향해 오르고 있다 새끼고래를 등에 업고 있는 어미 고래, 작살이 꽂힌 고래, 물을 뿜고 있는 고래, 고래 지느러미를 잡고 있는 사내도 보인다. 점박이 무늬의 호랑이와 노루, 눈짓이 은근한 학과 그걸 외면하고 흘끔거리고 있는 학, 부부인 듯 아닌 듯 물 너머로 지는 하루 시(詩) 없이 행복하기만 하루가 사슴 배처럼 불룩하다 다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이 있
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 표를 얻은 조봉암 선생 결국에는 없는 죄목으로 죽게 되었는데서대문형무소에서 먹던 밥을 남겨 배고픈 새들에게 주었다는 사실 창틀 사이 내민 밥 손에 앉아 새들이 쪼아먹었다는데 그가 죽고 난 후 새들이 봉암 봉암 울었다는데망기忘機*란 그런 것이다 기를 잊어버리면 사악함이 없어져 새들도 천진무구해지는 법그가 죽기 전 읽어 달라던 누가복음 23장 22절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나니 그러나 소리가 소리를 불러 예수를 죽게 했고 그럴싸한 기機가 결국 그를 죽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둘이서 시집을 묶은 김동찬 시인의 고향 무안군 일로읍에는 회산 연꽃방죽이 있다 10만 평이나 되는 넓은 방죽에 연이 가득하다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맑은 눈빛의 연꽃을 보며 그늘도 없는 방죽을 빙 돌다보면 얼굴이 검게 그을려도 기분이 상쾌하다맑은 물로 씻어냈으면서도 요염하지 않고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아지고, 반듯하고 깨끗하게 서있어서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벼이 희롱할 수 없음이여*연꽃은 언제나 한 채의 집이다들고 나는 마음을 모두 받아주는 곳 나가도 외로워하지 않고 들어와도 옥대기지 않는 향기가 넘치는
오늘은 해남이 생겨날 때의 얘기를 하고 싶어요. 반도의 땅끝, 불새가 날아와 동백꽃을 피웠다는 식의 얼렁뚱땅한 얘기 말고 좀 더 살에 와 닿는 얘기 말예요.해남은 오랜 옛날 중생기 백악기에 북서태평양 열도에서 있었던 격렬한 화산활동이 일어났어요. 오래전 중생기 해남을 둘러싸고 있는 섬들, 가파른 해식 절벽, 해안의 심한 굴곡들이 그 증거예요.그때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물을 따라 떠내려 왔거나 호수위로 비 오듯 떨어져 내렸어요. 요즘도 퇴적층 속에서 화산재가 심심찮게 발견되는데요 자그만치 8천5백만 년 전 얘기예요.화산 연기가 솟아오
추위가 물러간 자리 물러가다 꽃샘으로 한 번 더 난장 친 자리 성낼 법도 한데 너는 묵묵부답 가장 선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온다젖내 나는 아이의 갓 돋아난 이빨처럼 뾰쪽 날카롭게 돋아난 꽃잎들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종알거리며 연신 고개를 까불거린다 그 고개 젖히며 눈썰미 감추는 고갯짓으로 구례 산동마을 집들과 거리가 온통 출렁거리고 있다지붕들을 떠메고 주천면 용궁 군락지 구룡계곡 거쳐 백두대간 가볍게 날아오르리더러는 게 중에 더 선한 놈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루비보다 붉은 열매로 돌아올 것이다 달고 떫고 신 열매 하얀 눈밭에 맨발
나유? 달걀처럼 한쪽이 갸름하고요 눈과 눈 사이에 긴 사각형의 무늬가 있어유 낙지랑 비슷하지만 8개 팔이 거의 비슷한 길이로 짧아유 눈 아래 양쪽에 바퀴 모양의 동그란 무늬가 있는데 모두 금색이유 몸 빛깔은 변하긴 해도 대체로 자회색이에유깊지도 않은 수심 10m 가까운바다 바위틈에서 살아유 주로 밤에 활동하쥬 바다 밑의 오목한 틈이 있는 곳에 포도모양의 알을 낳아유 봄이 되어 수온이 올라가면 새우가 많아져 서해로 가유 소라와 고둥의 빈껍데기가 제집이유 사람들은 이것을 그물에 달아 통째로 잡아올리지유 우리는 그래도 맨날 바보같이 속고
매화이야기이지엽매화를 좋아한 김홍도는 어떤 사람이 매화나무를 팔려고 왔지만, 돈이 없어 살 수 없었네. 그런데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청하고 그 사례비로 3,000냥을 주자, 그길로 2,000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800냥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함께 마셨다네. 이를 ‘매화음(梅花飮)’이라 불렀다는데퇴계 이황은 유언으로 “매화 분재에 물을 주거라”고 했다지. 그 제자인 한강 정구는 고향 성주에 회연서원을 세우고 뜰에 매화를 심고 백매원(百梅圖)을 만들어 수양했다네. 백 폭 매화가 만발한 회연서원 백매원!중국 북송시대 임포는 매화를
달집태우기풍물패들 가가호호 걸립을 돌아 지신밟기를 해주고 땔나무와 짚단을 조금씩 거출했지. 상중(喪中)이거나 출산한 집, 부정한 가정은 건너뛰고 화목이 마련되면 달이 뜨는 맞은편 산날망이나 마을 앞에 달집을 짓지.긴 막대 서대 개를 움집 짓듯 원추형으로 세우고 그 꼭짓점을 묶으면 돼. 집 속에는 잘 타는 짚, 마른 나무, 생죽을 넣고, 바깥쪽에는 솔가지를 차곡차곡 쌓고. 그런 다음 이엉을 엮어 씌우고 칡덩굴이로 감았지. 달이 뜨는 맞은편에는 ‘달못’을 내고이윽고 날이 저물면 온 동네의 사람들이 달집 주변으로 모여들었지. 마침내 동쪽
다시 ‘마을’을 생각한다이지엽장욱진의 마을(A Village)에는 세 채의 집과 세 그루의 나무가 엇갈려 있다 그 사이로 해와 소와 개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뾰족한 못을 여러 번 긁어 해를 그려넣었다아래쪽 집 두 채에 가득히 그려넣은 어린이 얼굴천진난만한 얼굴들이것이 마을이다. 그러니 마을은 사람이며 세계이며 작은 우주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학교가 있고 스승이 있다칠판이 없어도 아이들은 배우고 상점이 없어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간디의 마을 ‘스와라지’, 서로가 하나로 서는 자치, 자립의 마을 마을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설 이지엽설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숨어 있지 삼가다, 섦다, 설다, 서다 무탈과 늙음 사이 새로움을 세우는 날 그 많은 뜻 담고 있으니 옛날에는 이레 전부터나 시작되었는데 종일 불 피워 조청을 고아내고 틔어온 튀밥으로 오방색 과를 만들고 하얀 김 설설 나는 가래떡을 대청에 널어꼬득해지면 종일 어깨 아프도록 썰어내고 마을 공터에선 부쩍 요란해진 뻥튀기 대포소리안에서는 휘두두둑 장작불 튀는 소리부꾸미와 전을 부치는 소리 고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 모락모락 뽀얀 김에 안까지 잘 안 보이던 정지를 자꾸 훔쳐보기도 하다가 어른들은 설날 아침
해남 고구마 이지엽 요것이 좋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여야 키우는 것도 징하게 간단하다이 씨고구마를 습하고 따뜻한데 심그믄 한달 후에 싹이 나오는디 그 싹 계속 잘라내면 이 싹을 잘라 땅에 심는 거여 뿌리가 내릴 때는 가뭄이 들면 안 되지만 물이 많아도 금방 썩어부니 조심혀야 혀 서리 내리기 전까지 그냥 걷어내믄 돼 의가 좋아 이놈들은 하나 나오면 줄줄이 따라나오지 않든?무지방에 칼륨인가 뭔가도 풍부 하단마다 변비에도 그만이고 말려 먹으면 쫀득하고 달고 소녀시대 서현이도 너무 좋아해 손발이 노랗게 변했다카드라 요게 다 좋은디 좀 먹었
바다의 옷 -지주식 돌김 이향용 氏햇살과 바람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바다 농사꾼 김발에 파래일면 김농사 엎는 법인데 그래서 염산(鹽酸)을 뿌리는 법인데 애들 밥상에 바다 농약인 염산을 뿌리는 것이 께름칙해 그냥 말장을 박아 김발을 매단다하루 두 번 씩 물이 들면 김발은 잠기고 물이 나면 김발은 햇볕과 바람을 받는다9월에 김 씨를 붙이고 11월 요맘때가 절정이지라우 김이 물에 있을 때 참 이쁘요 할랑할랑하게 꽃송이처럼김은 바다의 옷해의(海衣)다 전라도에선 해우라 부르는데해우(海牛)라 그럼 바다의 쇠고기! 그럴 법도 하다김발이 물에 닿아
하늘 그물 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그물 펼쳐놓았는가 휘어졌다 펼쳐나가고 나간 듯 조여들어 시시각각 변해가는 천애무변의 하늘 그림자수십만 마리 가창오리떼가 펼치는 이 화려한 군무 둥기둥 튕기는 선율과 떨리는 탄력의 저 파동 신의 손으로 빗은 고저와 깊이를 잴 수 없는 아, 아득하고 오래된 노래끝 간 데 없는 오십만 평 갈대밭 머리 황새도 저어새도 후미에서 후득이는 평화와 황금 물빛 물고 나는데 고천庫千이라 천 개의 창고를 곡식으로 채우고도 남을 저 달빛이항적도 뱃고동도 없이 배 한 척을 띄우네 고천암방조제(庫千巖防潮堤
신발 한 컬레 사립문도 똥개도 없는 집창호지를 갓 바른 방문에는 숟가락 하나 꽂혀 있다그냥 닫아만 두믄 유재 와서 맥없이 지달리기도 하니께… 가져갈 건 암긋도 읎어댓돌 위엔 잘 닦인 하얀 고무신 한 컬레영감은 몇 해 전 떠났어자는 듯이 갔어 더 살믄 좋은 디 여든은 넘었으니 마치 맞게 간 거여 나 혼차 살어 쪼간은 섭섭해 그 양반 즐겨 신던 하얀 고무신 거기 논거여창호문에 붉으레한 단풍잎 서넛 박혀 햇살이 어룽거린다햇살도 이런 날은 고무신에 앉아 해찰부리다가 할머니 손등에 내려 어리광 부리다가 조금 늦게 가
수성송 이야기 이지엽땅끝 해남군청 앞에는 수성송이 있습니다.아버지의 아버지의 웃대 웃대부터 해남을 지켜온 소나무입니다내 벗이 몇이나 하니 고산의 물음에 나도 그중 하나라고 수염을 늘어뜨리며 연동 뜰 거닐다가다산이 읊조리는 애절양(哀絶陽) 시를 탐진강 내려보며 간곡히 간곡히 바람으로 쓸어내리다간6․25 4․19 5․16 5․18 다 지나 오늘은 청청 울울청청 만조백관 다 거느리고 호령하고 계십니다 우슬재에서 소처럼 무릎 꿇고서도 공재 자화상이 울분과 분노를 묵묵히 견디듯 500년을 훌쩍 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