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리는 온갖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어요. 상업이 발달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하나 둘 중앙리에 정착했거든요”화산 중앙리 이장을 맡은 지 3년째인 엄재영(67)이장. 그는 군대를 제대한 후 고향 석정리를 떠나 지난 1973년 중앙리에 터를 잡았다. 전파상 운영을 시작하면서였다.중앙리는 온갖 사람들로 붐비던 마을이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사왔고, 면소재지 근방이었기 때문에 유동인구도 많았다. 상가가 밀집되면서 화산장이 열리지 않은 날에도 손님들로 가득했다.화산장은 한 번 장이 열리면 지금의 마을
송지 어란리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던 청년 박주정(54)이장. 그가 어란 청년회장을 맡다가 이장이 된 지도 벌써 6년째다. 49살에 처음 이장을 하게 됐으니 농촌에서 보기 힘든 젊은 이장이었다. 게다가 어란리 이장의 임기는 1년. 6번째 이장을 맡을 정도로 마을일에 열정적이다.어란리에 들어서면 짭쪼롬한 바다 냄새가 풍기고 마을 곳곳에 놓인 부표와 그물, 밧줄 등이 곳곳에 보인다. 김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부유한 마을다운 풍경이다.“어란리가 다른 마을보다 소득도 뛰어나지만 면적도 넓고 주민 수도 월등하게 많아요. 해
친환경 김으로 유명한 황산 산소리에는 정성자(60)이장의 야문 손길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올해 4년차 여성이장을 맡고 있는 정이장은 이리봐도 저리봐도 푸근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장일을 할 때 만큼은 여장부로 변신한다.꽃다운 27살, 무안에서 해남으로 시집왔다는 정이장은 산소리에 뿌리를 내린지 33년차다. 남편과 함께 김양식과 농사를 하며 살다보니 산소리는 어느덧 고향 무안보다 더 고향같은 곳이 됐다.정이장은 마을에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마을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마을도
5일장 근방을 따라 쭉 이어지는 상가권 덕에 북적북적한 해남읍 고도리. 올해 고도리에서 읍내 최초의 여성이장이 탄생했다. 37년동안 고도리에 애정을 갖고 살아온 이금순(63)이장이다.황산면 외입리가 고향인 그녀는 지난 1969년 결혼과 동시에 해남읍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남동리에 터를 잡고 월 3500원 세를 들어 살았더란다. 그러다 평동리를 거치고 고도리에 정착해 삶의 터전을 꾸렸다.일하기를 좋아하는 적극적인 성격 덕분에 고도리 반장을 17년, 부녀회장을 8년간 해왔다. 마을일을 하다 보니 일을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긴단다.
“예전에는 환갑 넘으면 이장을 못한다고 그랬는데 지금은 환갑 넘은 사람이 더 많이 해. 농촌이 고령화되다보니 환갑 넘은 사람이 이장 못하면 여기서 이장 할 사람이 없제. 내가 삼산면에서 나이로는 세 번째여”삼산 산림리 최경일(74)이장은 20여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산림리 주민들의 발이 되어왔다. 2년에 한 번씩 이장 경선을 했지만 그 때마다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이장을 맡을 수 있었던 건 파란만장했던 삶에서 얻은 철학 때문이란다.최이장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최이장의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당시
봄날처럼 따스한 마을이라는 마을비석이 인상적인 계곡 방춘리. 이 마을은 순천김씨 집성촌이다. 그렇다보니 한 동네 주민들은 이웃임과 동시에 가족이기도 하다. 김상대(66)이장도 순천김씨. 마을을 돌보는 게 가족을 돌보는 일이나 다름없단다.김이장은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엔 농사를 꽤 지으셔서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단다. 다른 아이들이 고무신을 신을 때 운동화를 신었을 정도였다.그러다 김이장이 27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잃게 됐다. 간경화였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논과 식량창고를 남기고 모두 팔아 병원
화산면에서 주민수가 가장 적은 은산리. 총 주민수가 22명이다. 주민들 수를 헤아릴 때 손가락 발가락 다 쓰면 셀 수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이 가능할 정도다. 세대수는 14호로 옆마을 경도리보다 2세대가 많지만 혼자 사는 주민들이 있다 보니 주민수는 더 적다.가족같은 분위기인 은산리에서 가장노릇을 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최상기(66)이장이다. 올해부터 이장을 맡게 됐다는 최이장은 은산리에서 태어나 한 마을 주민과 결혼까지 했다는 본토박이란다.“우리 마을? 화기애애한 분위기 빼면 더 말할 게 없지. 몸이 어디 아프시다 그러면 금방
“이장은 바보처럼 살아야 해. 주민들 위해 하는 일이니 내가 잘나서 이장 한다는 것보단 주민들 의견 잘 듣고 행동하는 바보라고 생각해야지” 해남읍 해리 마을일을 14년간이나 꾸준히 맡아온 정기행(72)이장의 철학이다.정이장이 이런 철학을 가지게 된 것은 행정리상 읍내에서 가장 주민수가 많은 해리의 특성 때문이다. 가구수 약 1600호, 47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어 어지간한 면단위보다도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주민들의 의견과 요구사항을 절충하고자 스스로를 낮추게 된단다.해리는 단독주택뿐만 아니라 아파트 8곳이 포
옥천면 흑천리 이장을 7년째 맡고 있는 윤광석(74)이장. 윤이장은 45년동안 서울에서 지내다 지난 2007년 해남으로 내려온 귀촌인이다. 그렇다면 고향이 흑천리일까? 그것도 아니다. 윤이장의 고향은 강진. 귀촌하기 전 해남에 내려와 일하고 있던 아내를 따라 함께 정착하게 됐다.“흑천리는 전현직 공직자가 20여명이에요. 우리 나이대에 대졸이 15명이나 되고, 판검사를 4명이나 배출한 마을이죠.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보니 시골이 낯설었는데 이 마을이라면 잘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노년기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무대로 흑천리를 고른
마을 입구부터 반겨주는 아담한 꽃밭이 인상적인 송지 소죽리. ‘세월도 쉬어가는 곳’이라는 멋들어진 명패가 걸린 쉼터와 알뜰살뜰히도 꾸린 작은 화단이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소죽리의 느긋한 시골정취는 ‘싸묵싸묵‘ 일한다는 노명심(58)이장의 손끝에서 나온다.지난 2004년 처음 이장을 시작했다는 노이장. 3년간 마을에 봉사하고 다시 이장을 맡은 지 3년차로 총 6년 경력의 이장이다. 소죽리 안으로 들어가면 비탈진 고개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반듯반듯 쌓아올린 담벼락들을 쭉 가로지르는 마을 안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깔끔하게 정돈
황산 우항리 박상용(57)이장은 마을의 저울추다. 마을 청년회에 고문으로 참여하는 가장 나이 많은 청년임과 동시에, 노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주민들 중심에서 소통하는 역할이다.지난 2006년에도 이장을 2년 맡았다는 박이장. 그 당시 이장을 했을 땐 마을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이장이라는 생각에 주민들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49살 때 이장 했을 땐 젊은 혈기로 일하다보니 앞만 보고 달렸어요. 참살기좋은마을 사업도 신청해 전국 3등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북평면 서홍리. 완도가 지척인 바닷가를 끼고 달려오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서홍마을’이라 쓰인 작은 비석을 지나치자마자 마늘밭들이 눈에 띈다. 깔끔하게 닦인 길로 쭉 들어오면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나타난다. 바짝 붙어 있는 집들 중엔 슬레이트 지붕도 꽤 보인다.전형적인 보통 시골처럼 보이지만 속사정은 조금 다르다. 마늘 농사만 해도 가구 평균 4천평씩 짓고 있어 한 마을에서 나오는 마늘 양이 어마어마하다. 마늘쫑만 4~5만단이 나올 정도란다. 여기에 바다에서 나는 꼬막이며 석화, 감태까지 풍부하다. 덕분에 서홍리는 주민들
올해 삼산면 이장단장을 맡게 된 도토리 조평환(65)이장. 그는 이장 3년차에 이장단장까지 하게 될 정도로 열성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지난 1973년, 군대를 갓 제대하고 도토리로 돌아와 1년 동안 1장을 했던 조이장은 이후 객지로 떠나 방송국 생활부터 종로학원 원장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단시간에 이장단장을 맡게 된 것은 여러 경험을 쌓았던 젊은 날의 열정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어서란다.그러다 노부모를 모시기 위해 귀농한지 벌써 12년차. 농사를 생업으로 삼으며 여행사 이사도 맡고 있지만, 바쁜 와중에도 이장일은 꼭꼭 챙긴다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산골짜기 마을 송지 삼마리. 삼마리의 신호균(76)이장은 삼마리를 책임지는 일꾼으로 보낸 시간이 16년이나 됐다.신이장은 지난 1970년대 한창 젊던 시절 처음 이장을 맡았다. 1년을 열심히 일하고 서울로 올라가 건축일을 한지 약 30년. 다시 고향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귀향한지 벌써 21년차 됐단다.귀향 후 2년이 지난 1996년, 주민들의 권유로 또다시 이장을 맡게 됐다. 중간 중간 1~2년 쉬어가며 마을 일꾼으로 일하다보니 어느덧 16년이라는 시간을 이장이란 호칭과 함께 보냈다.팔순을 바
“이장이라는 게, 정말 이장답게 하려고 하면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만만치 않아”풍요로운 바다가 자랑거리인 화산 송평리는 세대수 72호로 190여명 가까이 살고 있는 큰 마을이다. 화산면에서 주민 수로는 네 번째란다. 그렇다보니 이장 일도 만만찮다. 김인철(56)이장이 주민들의 손과 발이 돼 분주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김이장은 김양식을 하고 있다. 어업 일을 하다 보니 어촌계장도 맡게 돼 9년 정도 했었단다. 새마을지도자 활동도 5년을 하며 마을 일에 참여했었다. 지금은 송평리 이장을 맡은 지 2년차. 이전에 마을 일에 참여
“노인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아요. 정겹기도 하고 사람 사는 것 같기도 하고. 노인들 모시는 게 정말 재미있고 행복해요”계곡면 황죽리 김영철(60)이장은 노인들의 마음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이장이다. 요양보호사와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베테랑이기 때문이다.김이장은 고향 황죽리를 떠나 해남읍과 객지에서 생활했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귀농해야겠다는 생각에 차근차근 준비하던 중 지난 2008년 요양보호사 제도가 생겼고 바로 자격증을 취득했다. 황죽리에 재가요양센터를 세워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단다.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2년
산이면 진산리에는 주민들 모두의 ‘어머니’가 있다. 산이면 최초의 여성이장인 주채심(55) 이장이 활약하고 있어서다.주이장은 부녀회장 6년, 산이면 봉사회장 4년 등 종횡무진 바쁜 삶을 보내다 지난해부터 이장까지 하게 됐다. 오랜 기간 부녀회장을 하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봉사 정신을 자연스럽게 익혔단다.“젊었을 때부터 활발하게 일하는 성격이었어요. 마을 일이란 게 다함께 즐겁게 살자는 거니까 나 조금 편하자고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열심히 참여했지요” 부녀회장을 하며 폐비닐을 모아 마을 자금을 모으는 둥 적
현산면 향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가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향교리에서 태어나 쭉 자리를 지켜온 김승조(71)이장의 큰 자랑거리다.향교리는 나지막한 집들 사이로 푸릇푸릇한 대나무들이 쭉 이어진다. 넓게 트인 밭과 돌담에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화목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래서인지 김이장의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화목이다. “화목이 제일 중요하제. 주민끼리 화목하게 살고 단합이 잘 되는 마을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이장 했지”현산면 이장들 중 가장 막내라는 김이장. 지난해부터 이장을 맡았기 때문인데, 실제 이장 경력은 10여년
북일면 내동리 이장은 연임이 없다. 140세대, 330여명이 살다보니 공평하게 마을 봉사를 하기 위해 2년씩만 한단다. 그런데 벌써 세 번이나 이장을 맡은 주민이 있다. 바로 문창옥(64)이장이다.내동리에 도착하니 길 가던 주민들이 문이장을 보고 멈춰 서서 반갑게 인사 건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문이장이 세 번이나 주민들의 선택을 받게 된 이유가 엿보인다.문이장이 처음 이장을 맡았던 때는 지난 2002년이다. 제주도에서 25년간 살다 고향 내동리에 돌아와 처음 맡은 마을 일이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 겁 없이 했제. 이
화산면 마명리 마을회관은 오늘도 주민들의 웃음소리가 넘쳐흐른다. 지난해 12월 준공된 새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매일 모여 담소를 나누기 때문이다. 여기엔 박의우(63)이장의 공이 크다.“이장을 하고 보니 회관을 다시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올해 4년차 이장인 박이장은 마명리 토박이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잠시 한 것을 빼면 마명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오랜 세월 마명리에서 살아왔지만 이장을 맡기 전과 맡은 후가 확연히 달랐다. 주민으로서 회관을 이용할 땐 불편하다는 생각으로만 끝났는데, 이장을 맡고나니 회관을 신축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