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께 내놓제, 안 그러면 이장시키것소” 라는 말하는 문내 서하리 주민들. 마을이장 최봉배(45) 이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젊은 사람이다보니 동에번쩍서에 번쩍, 얼마나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모르요, 그만큼 주민들에게 잘한단 말이요”.서하리 젊은 이장 최이장, 마을에서 가장 막내이면서 문내면 이장들중에서도 막내이장이다. 그의 이장직은 지난 2003년부터 3년간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다. 10년전, 그때 당시만 해도 35살이 이장을 한다는 것은 쉽지않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려면 마을 일도, 사람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인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옥천면 도림리 오영일(38)이장.이장을 하다보니 마을사람들도, 마을의 대소사도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더란다, 이장을 맡기전에는 그냥 스쳐가는 마을이었는데 요즈음은 마을주민들을 살피고 마을의 미래를 고민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오이장이 마을이장을 맡게 된 배경은 마을 어른들의 권유에 의해서다. 고령화된 마을에 새바람을 불어넣어보자며 주민들이 젊은 이장을 제안했던 것이다. 젊은 나이고, 마을일에 관심도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망설였지만 주민들의 바램을 뿌
상가가 주를 이루는 현산 시등 마을에서 정채운(52) 이장을 만났다. 한 때는 전남 서남부 대표 우시장이자 해남을 대표하는 오일장이던 월송장이 열리던 시등 마을은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흔적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예전에는 하루에 소만 300두 정도가 거래 될 정도로 큰 시장이었는데 요즘 장날에 보면 서너명의 장사하는 사람이 있을 뿐 장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정 이장은 안타까워했다.정 이장은 40대에 접어들면서 처음 이장을 맡았다. 동네에 노인이 많아 그 분들에게 봉사하고, 마을 사람들과 두루 어울리고 싶었기
쓸쓸한 들판 옆으로 조그맣게 나있는 길을 따라 가자 한 건물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신평리 마을 회관에 들어서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화투를 치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동네 분들이 항상 이렇게 모여서 놀고 있제. 겨울이라 일이 없응께 날마다 이라고들 있어. 난 여기서 애기라서 심부름이나 하제”김철규 이장은 올해 68세지만 마을 회관에서는 젊은이 축에 속한다. 올해로 18년째 쭉 이장을 맡아오고 있다는 김 이장. 비결을 묻는 질문에 “별다른 건 없고 항상 마을 주민들이 좀 더 편히 살 수 있는 방향을 생각했다”며 “마을
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마을회관 안이 시끌하다. 보통은 이장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일이 마을 주민 여럿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됐다.“아주 일을 잘하고 부지런해브러. 웬만한 남정네 몇이 와도 못 해 본당께” 묻지도 않았건만 대뜸 이장에 대한 자랑부터 늘어놓는 마을 주민들이다. 마을 아낙들도 정겨운 수다와 함께 옥천면 화촌마을 차은숙(여 61) 이장을 만났다.차 이장은 장성에서 태어나 결혼 후 도시생활을 하다 남편을 따라 해남으로 귀향한지도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었다. 12년 전 남편과 사별 후 홀로 농사를 지어오고 있다. 1만600
“IMF가 또 다시 온 것만 같아”11일 문내 농협 대의원 회의가 있던 우수영 유스호스텔에서 만나 정평길(69) 이장은 농촌의 현실을 걱정하는 말부터 꺼냈다. 이장 뿐 아니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정 이장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이장을 하던 대의원을 하던 자리만 차지하는 사람이 아닌 항상 적극적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그다.문내 목삼리 토박이인 그는 젊을 때는 도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부모님을 모시려고 귀향을 했다. 처음 귀향을 했을 때는 농업보다는 어업을 주로 했다고 한다. 바다를 끼
마을 입구에서 600년이 넘게 마을을 지켜온 나무처럼 지난 2000년부터 마을 이장 직을 묵묵히 수행해온 채홍병(59) 이장이 삼산면 대흥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흥리에서 태어났지만 공직생활을 하며 젊은 날엔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1998년 경 귀향을 하게 됐다.소를 키우며 열심히 살던 그에게 마을 어른들은 공직 생활의 경험도 살리고 면내 많은 사람들을 두루 사귀라며 이장 자리를 권했다. 시골생활에 익숙지 않았고 공직 생활을 오래해 이장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마을
건강한 노인들이 살아가는 장수마을로 유명한 북평 동촌리에는 마을을 섬기는 김금효(51) 이장이 있다. 김 이장은 “우리 마을은 뒷산에서 내려오는 자연수를 식수로 쓰고 있다”며 “자연수가 바로 장수의 비결이며 우리 마을의 큰 자랑이다.”고 말했다.동촌리를 떠난 적이 없다는 김 이장은 청년회 시절 부지런하고 똑 부러지는 일처리로 주위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김 이장의 이런 점을 높이 사 주위 어른들이 이장을 맡아보길 권해 지난 2011년에 이장 직을 맡았다. 묵묵히 맡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주위에서 좋게 봐줘 지난해에 연임을
“마을에 젊은이들이 없어서 걱정이지만 농사지으러 오라기도 머하다니까. 땅이 있어도 자재비며 인건비도 계속 오르고 농산물 가격은 계속 떨어지기만 하니까, 머 먹고 살 것이 있어야 오라하지.”얼굴 가득 미소를 잃지 않는 문내 충평리의 김초남(70) 이장은 흐린날씨 만큼 어두운 동네의 앞날을 걱정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42가구 70여명이 사는 충평리는 5~6가구를 제외하면 모두 65세 이상 노인들이 사는 고령마을이다. 단독가구도 27세대나 되고 마을에 젊은 가구는 겨우 2가구 뿐 이다.마을냇가를 따라 버들나무가 쭉 자라있어 유평마을이라
“나이가 올해 76살인데 이장 한지 9년차여. 주민들이 한 번 해보소 했던 것이 벌써 이렇게 됐구만. 주민들이 워낙 잘 따라주니 별 탈 없이 이장할 수 있었지. 그게 참 고마워”해남읍과 삼산면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인 삼산 창리. 4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창리에는 삼산 최고령 이장인 이종헌(76)이장이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다는 그는 창리를 그 어느 마을보다도 살기 좋은 마을이라 표현한다.창리가 살기 좋은 이유는 조용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란다. 창리는 국세를 보관했던 창이 있던 곳이었는데, 도둑들이 창리를
365일 농사짓느라 정신없이 바쁘다는 산이 외송리. 농사 규모가 큰 주민들이 많은 부농 마을이란다. 쉴 틈 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도 30~40대의 젊은 청년들이 농사와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올해 이장을 맡은 박영선(39)이장도 그 중에 한 명이다.박 이장은 귀농한지 5년째다. 고등학생 때 외송리를 떠나 경기도에 자리 잡았다가 나이드신 부모님의 농사일을 물려받기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신출내기 농사꾼 티를 벗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지금은 논 2만평과 밭 1만5000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외송리
문내 선두리는 부창부수라는 말이 떠오르는 부부가 있다. 조인현(52)이장과 그의 아내 김영례(46)부녀회장이다. 마을 일에 대해 물으면 조 이장과 김 씨가 번갈아가며 척척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선두리 최고의 콤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선두리는 조 이장의 고향이다. 그는 우수영중을 졸업한 후 또래 친구들이 그러하듯 객지로 떠나 큰 꿈을 꿨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아내를 만났고, 선두리로 돌아가는 건 나이 지긋한 노인이 돼서야 가능할거라 생각했었다.하지만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현산 만안리는 산으로 한 폭의 병풍을 두른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예전에는 아름다울 미(美)를 붙여 미세라고 불렸다. 아름다운 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서영남(50)이장.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몸매에 카리스마 있는 얼굴을 가졌지만, 마을 자랑을 할 때면 금세 미소를 머금는다.올해로 4년차 이장을 맡고 있다는 서 이장은 자신을 전형적인 농사꾼으로 소개한다. 논 1만 6000평과 밭 7000평을 경작하기 위해 바삐 오가며 생활하고 있단다. 밭에는 양파와 배추를 주로 심는데, 절임 배추
계곡 당산리로 들어가는 길은 눈이 즐겁다. 주민들이 힘을 합쳐 넓힌 진입로는 세심하게 꾸민 동백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이고, 마을회관에 도착하면 시골에서 보기 드문 넓은 주차장이 사람들을 맞이한다.곳곳에 돌담집이 눈에 띄는 당산리는 주민들 유대감이 끈끈하기로 소문난 비슬권역에 속한 마을이다. 비슬권역은 당산리와 강절, 신기, 태인 등 4개 마을이 아름다운 농촌을 만들기 위해 똘똘 뭉친 곳이다. 마을마다 각기 다른 개성들을 갖고 있는데, 당산리는 마을회관까지 들어오는 진입로가 가장 큰 자랑거리란다.임대식(68)이장은 당산리에서 7년째 이
벼가 고개를 숙이는 가을, 옥천 마고리는 새를 쫓기 위한 공기총 소리가 요란하다. 마을 곳곳이 영글어가는 벼로 가득해서다. 땅이 비옥해 실 세대수 37호 중 한 집을 제외하고 모든 주민이 쌀농사를 짓고 있다 보니 새가 많단다.8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송우석(69)이장도 1만평의 쌀농사를 짓고 있는 농사꾼이다. 황산 외입리가 고향인 그는 10살 때 마고리로 이사와 농사짓는 부모님의 모습을 따라 농사꾼의 길에 발을 내딛게 됐다.20대에 마을 이장을 맡을 정도로 농사에 열중했던 송이장. 30살이 되던 해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영춘제
삼산 송정마을은 ‘수세 없는 마을’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물이 풍부해 물세를 따로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마을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마을 내부로는 두륜산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른다. 오래 전 주변 마을과 함께 보를 만들어 마을로 물을 끌어들이고 있어서다.송정리가 고향인 이관재(60) 이장은 흙과 돌로 만들었던 보를 지키기 위해 고생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단다.“마을 곳곳에 수로가 있는데 수로 끝의 공간에 주민들이 작물을 심어 더 폭이 좁았어요. 3년째 이장하면서 개거사업과 농로포장을 개선하려 꾸준히 노력
“충무리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잘 알아요. 해설가 수준일 정도죠. 충무사에서 이충무공 탄신일 다례행사 등을 지내고 있어서인지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문내 충무리 이장을 맡은 지 2년차인 최성재(65) 이장. 그의 고향은 동외리다. 동외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6년 동안 동외리 이장을 맡기도 했었다.오랜 생활터전이었던 동외리를 떠나 충무리로 오게 된 것은 이순신장군과 관련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역사유물인 보물 제503호 명량대첩비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시작되면서였다. 명량대첩비가 있던 곳이 최이장의 집 인
“이장 하면서 농촌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되고, 농사와 농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이 됐어요. 인간관계도 많이 배웠고요. 자기개발 할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송지 방처리 황인선(58)이장은 30대부터 이장을 맡아 일한 기간만 10여년이 훌쩍 넘는다. 젊은 시절부터 이장을 해 어릴 때부터 농사일에 빠삭한 농사꾼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 그는 농사지을 땅조차 없었다.지금은 무화과 1600평과 2만8000평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황이장. 학업을 위해 광주고로 진학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다시 방처리로 돌아
황산 성만리는 마을 구조가 독특하다. 마을 한 가운데에 저수지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축조된 저수지인데, 지금은 저수지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둥그렇게 살고 있는 형상이다. 한 마을에 모여 살지만 저수지 때문에 띄엄띄엄 떨어지게 됐단다.그렇다보니 박영배(65)이장의 일거리는 배로 늘어난다. 회관에서 하는 방송이 아예 들리지 않는 가구도 8가구 가량. 그런 주민들에게는 일일이 전화를 해 신청해야 할 서류며 새로운 정보들을 전달한다.“예전에 차가 없을 때는 마을 한 바퀴 도는 것만 해도 한 나절이 걸렸어. 성만리가 3지구
8년의 이장경력을 지닌 옥천 월평리 김병채(51)이장. 지금은 농사일에 익숙한 농부이지만, 그는 한때 유조선 배를 타고 중동까지 다녔던 뱃사람이었다.옥천중을 졸업한 후 광주 조대부고에 진학했던 김이장. 부산의 한국해양대를 입학하게 되면서 배를 타게 됐다. 원유를 수입하는 유조선 배를 타고 중동을 오가는 생활을 5년이나 했었단다.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부모님을 모시며 농사를 짓던 동생에게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교통사고였다. 김이장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지난 1997년 월평리로 돌아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