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3년 9월의 어느 주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진산리 집으로 돌아가던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슬며시 꾀가 났다. 일찍 집으로 들어가 봐야 일이나 시킬 것 같아서였다. 뭔가 놀잇감이 없을 까, 주위를 살펴보던 소년의 눈에 길섶으로 무덤처럼 봉긋한 둔덕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있는 게 보였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사금파리와 같은 그릇 조각들이 흩어져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여기에다 그릇을?’ 그런데 그릇 파편들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고.가까운 면사무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우리가 무심코 먹다 버린 쓰레기가 모르는 동안 타임캡슐이 되어 지금을 증언하는 귀중한 문화재가 된다면? 자칫 황당한 잠꼬대라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절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대사의 실마리를 추적하는데 있어 패총만큼 좋은 단서가 되는 것도 없다. 패총(貝塚). ‘조개무지’라는 고고학적으로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이것은, 사실 고대인의 생활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오랜 세월동안 분해돼 사라지지 않고. 온전히 흔적을 남긴 까닭에 문화재급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해남 송지면 군곡리(郡谷里) 패총이 세상에 알려
새로운 밀레니엄의 흥분이 아직 남아있던 2001년 봄. 국내 자원개발을 총괄하는 대한광업진흥공사의 자원탐사처 사무실로 낭보(朗報)가 날아들었다. 프랑스의 인공위성으로 해남 황산면 부곡리 일대의 지형을 찍은 사진에서 금맥이 발견된 것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납석을 채굴해온 성산 광산이 있고, 15년 전부터 금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제대로 된 탐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광상(鑛床)이론상 해남과 같은 화산암 지대에서는 금이 나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금맥이 발견되다니. 19
올 봄에 해창주조장 주인인 오병인은 정원을 정리하다 땅에 묻혀있던 빗돌 하나를 발견한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비(誓詞碑)’였다. ]빗돌을 발견한 오병인은 평소 해창주조장의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해 노력해 온 박승룡 선생에게 연락을 했고. 한 달음에 달려온 박 선생은 내용을 살펴보고는 맞다고 확인을 해준다.‘황국신민...’은 1937년 일제가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맹세문으로, 우리가 군사정권 시절 국민의례 때 다 같이 외워야 했던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것이었다. 그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문내면 예락리 마을회관 맞은편에 해남 최초의 천주교회인 예락 공소(公所)가 있다. 장엄한 모습의 여느 성당과는 달리 시골 공소다운 소박한 모습이다. 공소 앞에 세워진 빗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다.‘해남지역에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은 문내면 지역이다. 1897년 목포가 자유무역항으로 개항되자 목포 산정동성당을 중심으로 복음 선포가 시작되었다. 해남지역에서는 예락마을 김명범 베드로, 김보현 요셉, 박내국 요왕이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천주교가 전해졌다. 1904년 설립된 예락공소는 해남에서 유일한 교우촌
2년 남짓 되었을 것이다. 2013년 9월로 기억되는데, 그때 불상연구가인 성춘경 선생과 청산도를 같이 간 적이 있다. 성 선생과는 언론계 대선배이신 임준수(전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 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것이었는데 두 분은 청년시절부터 고희를 훨씬 넘겨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50년 넘게 각별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사이셨다. 청산도 여행은 이들 두 분과 해남친구인 천기철 땅끝문화 대표가 함께 했다. 성 선생이 광주에서 차를 갖고 나중에 합류한 까닭에 그 분 차를 타고 청산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청산도 여행길에 들은 성
사람들은 일상이 권태로울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청춘의 시절이 그랬다. 오래 머무는 것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어디든 떠나야 직성이 풀리던 그 시절. 80년대 중반쯤 이었을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전북 익산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망해사(望海寺)라고. 바닷가에 절집이 있어. 같이 가보지 않을래.” 망해사라. ‘바닷가에 있는 절’이라는 친구의 말에 끌려 김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망해사를 가려면 김제에서 다시 심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는데. 당시 이
현산(縣山) 월송장(月松場)은 우(牛)시장으로 유명했다.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월송장은 지난 1973년 현산면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송지장(松旨場)으로 불렸다. 월송이라는 지명은 ‘송지향(鄕)’과 ‘송지부곡(部曲)’이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유래하며 지금의 송촌(松村)마을에 위치했다.시등(市嶝)마을에서 월송장이 열리면 하루 300~400두 가량의 소가 거래됐다. 영암은 독천(犢川)과 신북 등 두 곳에 우시장이 있었다. 낙지마을로 잘 알려진 독천이지만 ‘독(犢)’자가 송아지를 뜻할 정도로 우시장으로 유명했다.하지만 영암과 이웃인 해남은
황산면 한자리(閑子里)의 ‘꿀덕개’는 징의도 남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는 섬이었으나 간척공사로 육지가 된 곳이다. 77번 국도를 타고 고천암(庫千岩) 방향으로 호동리 한아마을 고개를 넘으면 한자리 마을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온다. 한자리 보건지소 맞은편에 있는 한자슈퍼에서 길을 묻는다. “꿀덕개라? 여서 곧장 가다 왼쪽 길로 들어서면 꿀덕갠디, 거기 뭐가 있다고. 가봐야 새우양식장밖에 더 있겄소.” 직진하면 청정 지주식 김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산소리 가는 길로, 한자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좌측 소로로 길을 잡아 나지막한 언덕을
강원도 철원 땅에 도피안사(倒彼岸寺)라는 다소곳한 절집이 있다. 근처에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철원군 노동당사가 있어 서너 차례 들렀던 기억이 있다. 가장 최근에 철원을 찾은 것은 4년 전 겨울, ‘황새 지킴이’로 잘 알려진 경기도 포천 지장암 주지인 도연(度淵) 스님과 함께 철원평야 진객인 두루미를 탐조하러 갔을 때였다. 도피안사는 민통선 지역인 관계로 한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곳이다.이름 그대로 피안의 세계와도 같았던 이 절집은 그러나 산중이 아닌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접근이 편리하다.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도
“나는 여행길에 오르면 그곳의 관광 안내판이나 비문을 꼼꼼히 읽는 버릇이 있다. 정보도 얻고 현장학습을 겸해서다. 평생을 문장과 낱말은 물론, 토씨 하나까지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기자직에 종사한 입장에서 보면, 그 지역의 최고 문사를 동원하여 썼을 법한 안내문, 비문들에 졸작이 너무 많다. 그런데 해남 여행 중 읽은 ‘땅끝길’ 안내판 문장은 나의 고정관념을 깬 군계일학이었다.”언론계 대선배이신 분이 얼마 전, 땅 끝에 들렀다 돌아가 한 SNS에 올린 글이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혼자 여행을 즐기시는 이 분은 추자도에 방을 얻
치욕의 일제 강점기는 우리 문화재에게 있어서도 수난의 시기였다. 당시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공식 확인된 것만 6만 7000여점에 달한다. 개인 소장 등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20만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는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은 채 실종된 상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왕릉이나 분묘의 도굴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만행은 고려청자와 같은 귀중한 매장 유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또한 사찰이나 폐사지에 있던 석탑이나 석물들도 이들의
경남 함양읍의 서쪽 위천(渭川)강가에 함양 상림이 있다. 9세기 말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였던 최치원이 함양읍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천년 숲이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렀으나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무너짐에 따라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게 되었다.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고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함양상림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숲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홍수의 피해로부터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한
얼마나 큰 포구였기에 ‘맏나루’라고 했을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벽해(碧海)가 상전(桑田), 아니 전답(田畓)으로 변한 오늘날 맹진(孟津)의 모습은 그야말로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이 옛 시인의 허사(虛辭)일 뿐, 파도가 출렁이던 자리엔 무심한 갈대만이 서걱거리며 길손을 맞고 있다.만대산(萬代山)을 병풍 삼은 맹진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선의 명풍수 이의신(李懿信)이다. 광해군 때 ‘교하천도설’을 주장했을 만큼 당대의 명풍수였던 이의신과 관련한 전설은 신화가 되어 해남 땅 곳곳에 남아 있다. 백년여우의
해남 땅끝 마을에서 시작하여 서울 남대문까지 1000리길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삼남(三南)길’이라고 부른다. 삼남길은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이 수 없이 지나던 희망의 길이요. 정계에서 밀려난 유배객들이 남도의 섬이나 제주로 귀양을 떠나던 낙망의 길이었다. 장성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갈재(蘆嶺)는 한양에서 남도로 오거나 남도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했던 고개다. 지금은 호남고속도로 노령터널이 전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갈재’를 넘는다는 것은 유배를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삼남길은 풍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4일 서울대 강연에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등자룡(鄧子龍)을 거론했다. 시 주석은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진린은 산이면 황조리에 세거한 ‘광동(廣東) 진(陳)씨’의 시조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수군 도독이다. 진린은 원래 영천(潁川) 진씨로 광동에 터를 잡은 만삼랑(萬三郞)의 후손이다. 19세에 파총에 임명돼 광동성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
경상도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남명은 세상을 보기로 했다. 예순 한 살. 환갑의 나이에 지리산이 좋아 고향 합천을 떠나 이곳으로 옮겨온 남명은 어느 날 지리산 너머 하동 악양이 길지라는 말을 듣고 길을 나선다. 고개에 오르니 악양의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들판을 내려다보니 골이 협소한데다 물이 섬진강으로 곧장 빠지는 것이 분명 길지는 아니었다. 남명은 주저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이런 연유로 고개는 ‘남명(南冥)이 발길을 돌렸다’ 해서 ‘회남재(回南峙)’란 이름으로 남았다.화담(花潭) 서경
관동포구를 찾아간 날은 늦은 가을비가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바다는 애잔했고, 포구는 쓸쓸했다. 관두량(館頭梁). 고려시대 중국과 교역을 하고, 북평면 이진(梨津)과 함께 해남에서 제주로 가는 항구로 번창했던 고대 해양도시. 그러나 오늘날 관두량은 옛 영화를 뒤로한 채 삼마도를 오가는 고깃배만 드나들 뿐, 한적한 어촌의 풍경으로 남아있다. 이곳 관두량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10여년 전 관두산 용굴동 풍혈이 매스컴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다. 그 때의 기억으로 다시 찾은 관동포구는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그러나
‘누가 만들었을까?’장고봉 고분에 대한 의문은 이 같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북일면사무소에서 내동리 쪽으로 길을 잡으면 길가에 일련의 고분 이름이 적힌 입간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방산리 신방마을 쪽으로 난 도로변에 장고봉 고분을 가리키는 입간판이 서있다. 알려진 바로는 장고봉 고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분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여기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학술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런 가운데 2000여 기의 전방후원분이
시원한 눈 맛이 일품인 시하바다 시오릿길 해남에는 두 곳의 땅 끝이 있다.하나는 잘 알려진 대로 송지면 갈두이고 다른 하나는 서북단 화원반도 매월리(梅月里)다. 이 곳 매월리를 찾아 가는 길은 마치 수학공식을 풀어가듯 길 찾는 재미를 준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라는 문명의 이기 덕분에 길 찾기가 일이 아니지만 예전 매월리 가는 길은 말 그대로 ‘해변산중’ 길이었다.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후산리 온덕(溫德,다순구미)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서 시작되는 매계∼월내간 시오리 바닷길이다. 짙푸른 시하바다가 시원한 눈 맛을 선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