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체 게바라’라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대중에게 그를 각인시킨 시집의 제목이 섬뜩했다. 나의 칼 나의 피!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짐작한 대로 그에 대한 수사(修辭)는 강렬하다. 민족시인·전사(戰士)시인·혁명시인 등등… 이는 암울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살다간 시인을 기려 일컫는 최고의 찬사다. 한 시절 그와 가까웠던 소설가 황석영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남도의 동백꽃. 마치 삶이 젊음의 처참한 쇠락을 보여주듯, 깨끗하게 목이 딱 꺾여 온전한 꽃 한 송이로 떨어지
사람들은 연정리와 월호리가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를 ‘검덕굴(골)’이라 불렀다. 검덕굴이라니. ‘검(儉)’은 ‘검다’는 의미로 단군왕검에서와 같이 ‘우두머리’의 의미가 있다.즉, ‘왕검(王儉)’의 ‘검’은 ‘검다’, ‘둘러싸다’에서 나온 ‘감(아래아(,)가 들어감)’이라는 말로 암흑을 상징하며 ‘웅(熊)’으로 상징되는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을 가졌다. 이처럼 단군신화는 환인(桓因)과 환웅(桓熊)이라는 ‘밝(아래아로 표기)신(광명신·光明神)’과 웅과 왕검이라는 ‘감(아래아 표기)신(지모신)’의 상반된 신개념이 공존한다. 또 단군은 제사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쓸쓸했다.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았던 청춘의 방정식.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떠도는 나그네 되어 무작정 찾아간 광주(光州). 그곳에서 친구인 N과 만났을 때. 그는 연인인 S와 함께였다. 스무 살 시절. 수원에서 모임이 있던 날. RNTC 하사관(부사관으로 바뀜)으로 5년이라는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던 N은 대낮의 통음으로 만취가 되어 현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내 인생은 하사가 아니야!” 그의 청춘은 불안했고. 불안은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어느덧 전역을 하고. 대학을 마칠 무렵 N은 공기업 간부사원 공채
‘어란(於蘭) 여인’은 허구(虛構)다. 적어도 이 이야기는 이러한 전제로 시작해야 맞다. 10년 전인 2006년. 송지 산정리에 거주하는 박승룡 선생이 ‘어란 여인’을 일반에 공개하자, 이의 실체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다. 호사가들은 ‘실존인물이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얻은 것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왜? 어란 여인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물증이 될 만한 사료(史料)가 없기 때문이다. 설혹 사료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진위를 둘러싼 구설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네 강단
해남읍 용정리에 오충사(五忠祠, 해남군 향토유적 제16호)가 있다. 이름 그대로 다섯 충신을 모신 사우다. 마을의 이름을 따 ‘용정사(龍井祠)’로도 불리는 오충사는 숙종 38년(1712)이순신을 배향한 충무사로 건립됐다. 이어 영조 16년(1740)에 류형을, 정조 20년(1796) 이억기를 각각 배향하면서 민충사로 개칭됐다가 순조 29년(1829) 이유길, 이계년을 추배하면서 오충사가 됐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고종 31년(1894)에 다시 공적비를 세우고 단이 설치됐다. 이어 1919년에는 후손들에 의해 삼문과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황사가 심하게 몰려온 날 오후. 매화꽃을 만나러 산이면 예정리에 있는 보해매실농원을 찾아갔다. ‘춘설(春雪)이 난분분하니’도 아니고, 하필이면 황사 낀 날이라니. 모처럼의 봄나들이가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과연 매화꽃을 만날 수는 있는 걸까. 뿌연 날씨를 의심하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따라 5리 남짓한 농원으로 접어든다. 매화마을로 유명해진 광양의 매화밭이 섬진강을 따라 가는 도로변에 노출된 것과는 달리 이곳의 매화는 마치 비밀의 화원을 찾아가듯 굽이굽이 찾아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길은 정겹다
계곡의 모든 길은 둔주포로 통한다? 그랬다. 둔주포(屯舟浦)를 빼놓고는 계곡면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넘실대던 바다가 뭍으로 바뀌기 전, 계곡면의 유일한 포구였던 둔주포는 번성한 장시(場市)로서 제몫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이야 길도 좋아지고 새로운 길도 생겨났지만 뱃길로 대처를 오가던 시절에 계곡면은 상면과 하면으로 나뉠 정도로 생활의 터전이 갈려 있었다. 대체로 상면은 비곡면(比谷面) 지역으로 우리말로 ‘빌메’ 밑 골짜기를 가리켰다. 골이 깊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이에 비해 비교적 넓은 들을 가진 하면은 청계면(淸溪面) 지역으로
2003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친구와 함께 수성리 길을 걸어갈 때 그가 말했다. “저기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는 집이 소설가 황석영이 살던 집이라네.”황석영(黃晳暎)이 해남에 머물며 대하소설 ‘장길산(張吉山)’을 집필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친구로부터 그가 살았다는 집을 전해 듣고 보니 왠지 그 집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친구의 집을 들를 적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 집을 보곤 했는데 오랜만에 찾아가니 집이 보이질 않는 거였다. 집터에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고. 느티나무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낭패였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집들을 다니다 보면 창건한 스님의 대개가 원효나 의상대사, 또는 자장율사이거나 도선국사인 경우를 보게 된다. 그 분들의 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동서남북 가히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창건했다는 절집이 화원에 있다. 그야말로 천년고찰 서동사(瑞洞寺)다. 화원면 금평리 절골(寺洞)에 있는 서동사는 고려시대 골짜기마다 암자가 들어서 한때 80여 동의 대가람을 이뤘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한 시절 절골은 해남의 불국토였던 셈이다. 이 절의 창건
누구냐 넌?장판교(長坂橋)에서 단기(單騎)로 조조(曹操)군과 마주 선 장비(張飛)의 모습이 이런 얼굴은 아니었을까. 유비(劉備)의 아들 아두(阿斗)를 품에 안은 조자룡(趙子龍)이 조조 군의 포위를 필사적으로 뚫고 장판교를 향해 말을 달렸다. 이때 다리 입구에서 장비가 장팔사모를 꼬나 잡고 조자룡에게 외쳤다. “자룡은 어서 가시오. 뒤는 내가 맡겠소.” 자룡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고 다리를 홀로 막아선 채 조조의 군대와 맞선 장비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하후걸을 향해 벽력같이 일갈했다.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아!” 이에 크게 놀란 하후
일지암(一枝庵)은 초의(草衣, 1786~1866)선사가 홀로 ‘다선일여(茶禪一如)’를 생활화하기 위해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짓고 살던 암자다. 초의는 일지암을 짓기 훨씬 전에 금강곡(金剛谷)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주변은 병풍바위가 우뚝 솟고, 맑고 찬 물이 흘렀으며, 온갖 나무가 무성했다. 다만 대나무만 없는 것이 서운해서 적련암(赤蓮菴) 곁에 있던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초의가 일지암을 짓기 전에 거처했다는 금강곡의 초암(艸菴)은 1823년에 지은 시에서 알 수가 있다. ‘금강골 바위 위에서 언선자와 함
대학 1학년 때였다. 무슨 과목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20대 후반의 여자 시간강사였는데 첫 수업시간에 칠판에 ‘무소유’ 세 글자를 써놓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선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당시 책은 문고판으로 나와 있었는데 순수의 시대를 동경했던 내게 그것은 적어도 하나의 울림이었고. 수업이 끝나는 길로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새롭다. 법정 스님. 그를 이야기 할 때면 으레 ‘무소유’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만큼 그의 출가행은 욕심 없는 청빈한 삶의 모습이었다. 무소유는 대중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8~1583),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로 추정).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 송나라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한시에 있어서 송시풍(宋詩風)을 따랐으나, 이러한 풍조를 배격하고 당시(唐詩)를 주로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정사룡(鄭士龍)·박은(朴誾)·박순(朴淳) 등이 이러한 당시풍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두드러지게 일파(一派)를 형성한 것이 박순의 제자였던 이들 ‘삼당(三唐)’이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았던 영화 ‘십계(十戒)’는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을 다루고 있다. 모세가 파라오의 허락을 얻어 이집트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마음이 변한 파라오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지팡이를 내리쳐 홍해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십계’를 비롯해 ‘벤허’, ‘쿼바디스’와 같이 ‘스펙타클’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대작이 잇달아 영화관에 걸리던 시절. 컴퓨터그래픽이 발달한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조
내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철비(鐵碑)는 경북 울진과 봉화를 잇는 십이령(十二嶺), 열두 고갯길에 있는 보부상 불망비다. 십이령은 동해 바닷가 마을인 경북 울진 흥부 장터에서 하당을 지나 두천을 거쳐 크고 작은 열두 고개를 넘어 영남 내륙인 봉화 소천장으로 이어지는 ‘미역과 소금의 길’이다. 두천에서 산길로 들어서서 울진쪽 바릿재~평밭~느삼밭재~너불한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를 지나 봉화 땅인 고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150리 산길이다. 이 길은 꼬박 3일 낮밤을 걸어야 했다. 얼마나 고단한 사역인가. ‘등금쟁
“저물어가는 을미년(乙未年) 세모(歲暮)에 북평면의 끝자락, 땅끝의 관문격인 영전리(永田里)를 찾았다. 이번 나들이 길에는 박승룡, 김천수 두 분 선생께서 기꺼이 동행해 주셨다. 송지 산정 사시는 박 선생은 전남도 교육위원을 두 차례 역임한 교육계의 원로이고. 김 선생은 광주 풍암고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후 고향인 화산 대지리로 돌아와 촌부의 삶을 살고 있다. 두 분과의 인연은 너무나 소중하고 각별한 것이어서 지면으로나마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소개를 드릴까 한다. 박 선생은 당신께서 발굴한 ‘어란 여인’의 현창사업을 위해 노심초
“고천암(庫千岩)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갈대였다. ‘고천후조(庫千候鳥)’라 해서 해남8경으로 고천암 철새를 꼽고 있지만 내가 먼저 만난 것은 갈대였고. 그래서인지 내게 있어 고천암 갈대는 강렬한 영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2003년 12월 성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해남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나는 저녁 무렵 고천암을 찾아갔다. 인생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해도 막상 한 시절을 머물렀던 곳과의 이별은 먹먹하기 마련이어서 무언가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질 무렵 고천암은 고혹적이었다. 방조
산림청은 지난 8월 화산 관두산(館頭山,178m) 용굴동 풍혈을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했다. ‘산림문화자산’이란 산림과 함께 살아온 선조의 생활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생태적·경관적·정서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유·무형의 자산을 말한다. 국가 산림문화자산은 산림청이 지정·관리한다. 이번에 지정된 산림문화자산은 관두산 풍혈 및 던(덤)바위샘을 비롯해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완도수목원 가시나무 숯 가마터, 울진 소광리 황장봉산 동계표석 등 4건이며 지금까지 모두 13건이 지정됐다. 추울수록 더운 김이 솟아오르는 곳지금으로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저는 아유타(阿踰陀)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부모님 꿈에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고 해 가락국으로 오게 됐습니다.’가락국의 김수로왕을 만난 허황후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건넨 말이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아유타국’이 어디냐를 놓고 학자들 간에 이설(異說)이 분분하나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또 김해 김수로왕릉에는 ‘쌍어문(雙魚紋)’이 그려져 있는데, 이
옥천 성산리(星山里)에 있는 만의총(萬義塚)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문득 남원 ‘만인의 총’을 떠올렸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을 합동으로 매장한 ‘만인의 총’은 이름 그대로 만 명의 무덤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의총’도 ‘임진왜란 즈음에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내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만의총’ 역시 정유재란 때 성산벌 전투에서 희생된 원혼들이 묻힌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2009년 3월 1호분에 대한 발굴조사